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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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출애굽기삭책(18) - 언약위에 세운 나라

  • 관리자
  • 2017-02-22 0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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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위에 세운 나라(출애굽 강해 18)
출애굽기 19 :1-25

 

출애굽기 19장은 '시내산 계약'의 서막입니다.

시내산 계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 후 삼 개월이 되는 날, 그러니까 90일이 되었을 때에 시내광야에 도착합니다. 아말렉과의 싸움 후에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이자 장인인 이드로의 조언에 따라 천부장과 오십부장과 백부장과 십부장을 세워 사명을 위임하고, 한숨을 돌립니다. 사명의 위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남교회를 위해 우리에게 사명을 위임하셨으며, 우리는 또한 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뢰하시고 사명을 위임하셨으니 우리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 묵상의 시간 – 골방의 시간

 

출애굽의 시작부터 아말렉과의 싸움, 재판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보냈던 모세는 이제 사명을 위임하고, 역할분담을 한 후에 한숨을 돌립니다. ‘한숨을 돌리는 시간’, 이 시간에 모세는 무엇을 했을까요? 휴식도 취했을 것이고, 피곤한 몸도 쉬었겠지요. 앞으로의 계획도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묵상의 시간’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분주할 때에는, 어떤 사건이나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분주함에서 벗어나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시내산에 오른 것입니다. ‘부르심의 주체가 누구냐?’라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모세가 산에 오른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른 것처럼 해석되어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세는 시내산에 오른 것입니다. 광야 한복판에 있는 시내산의 높이는 2,285m에 이릅니다. 한라산이 1,950m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백두산이 2,750m니까 시내산은 상당히 높은 산이요, 만만하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닙니다.

 

2월 12일, 주현절 여섯 번째 주일에 나눴던 ‘함석헌 선생의 시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를 다시 한번 읽어드립니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중략....

님이 좋아하시는 골방
깊은 산도 아니고 거친 들도 아니요
지붕 밑도 지하실도 아니요
오직 그대 맘 은밀한 속에 있네.

하략...

 

여러분에게는 골방이 있습니까? 조용하게 나를 관조할 수 있는 침묵의 시간, 기도의 시간, 묵상의 시간을 갖고 계십니까? 예언자만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묵상하고 기도하는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던 신앙에서 벗어나 우리의 본성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멋진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멋진 계획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멋진 계획은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5절에 나와 있는데 “네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전제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멋진 계획은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본인의 의지대로 하시지 않고, 이스라엘이 선택하게 하셨을까요?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은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선택의 여지 없이 살았습니다. 강제노역을 당하는 상황에서 명령에 따라 일해야 헸고, 삶의 주도권을 상실당한 채 살아왔던 것입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인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권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신이 아니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선택의 자유’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는 몫은 인간에게 주시고, 그 선택한 삶을 살아갈 때에 곁에서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곁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도우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제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며, 언약공동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권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인정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다 너를 위해서’라면서 자녀의 선택권을 빼앗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사랑을 빙자한 폭력인지 우리는 지혜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곡된 사랑은 서로 힘들게 합니다. 조금 더디 가더라도,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책임지게 하는 것이 제대로된 인격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언약을 합니다. 궂이 ‘기꺼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 상황에서 순종하기로 결단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기꺼이’ 순종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갈길 모르나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그 길이 선할 줄로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기꺼이’에는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아갈 민족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별된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그 뜻을 삶으로 살아갈 이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도 역시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우리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제사장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모두가 제사장이다.”라는 ‘만인사제직’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며, 제사장으로서의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언약의 백성과 토라(율법)

 

10-12절의 말씀에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해야 할 일이 나옵니다. 먼저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라.”고 하십니다. ‘옷을 빤다.’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몸에 밴 관습과 더러움과 노예근성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섬겨왔던 다른 신들을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께 정하고 끊어야 할 것은 끊어버리라는 요구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이런 결단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2절에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경계를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경계란 ‘선’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란, 신앙이란, 지켜야 할 경계를 지키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

시내산이 하나의 경계가 된 것처럼, 우리도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구별된 장소에 왔음을 알아야 하고,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세속과 거룩함이 구별되는 장소에 왔음을 알아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시내산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이라는 특정 장소에 고착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삶의 자리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당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당에 가둬두려고 합니다. 그 현상 중의 하나가 건물로서의 예배당의 대형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당이 진정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당이 건물적인 의미를 넘어서 교회이기 위해서는 구별된 장소라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이제 셋째 날에는 하나님이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것(11)입니다. 하나님은 “오늘과 내일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셋째 날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던 때에도 제삼일에 하나님의 산을 바라보았으며(창 22:4),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지낸 기간도(요 1:17) 사흘이었으며, 누가복음 13장 32절의 “제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제삼일’은 그냥 막연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고, 행동거지를 삼가면서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어떤 준비를 합니까? 아무런 준비 없이, 속세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분주함을 다 가지고 허겁지겁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가 어떤 예배가 되겠습니까? 예배를 드리기 전에 최소한 오늘, 금요일과 내일, 토요일은 준비하는 시간이고 주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라는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십시오.

 

이제 이들은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고 제사장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은 제사장이건 지도자이건 백성이건 모두 ‘토라(히브리어: תּוֹרָה, 율법)’ 아래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키는 토라는 오늘날, 구약성서의 첫 다섯 편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합니다. 흔히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토라는 히브리어로 ‘가르침’ 혹은 ‘법’을 뜻합니다. 토라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미슈팟(mishpat) - 최소한의 정의 2)tzedakah(쩨다카) - 분배의 정의(안식년, 희년 –나눔) 3)hesed(헤세드) - 언약에 바탕한 사랑 –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으므로 나도 사랑해야 한다. - 이런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섰을 때에, 광야생활을 할 때에 모세오경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이 토라입니다. 토라는 언약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경계를 분명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정의, 나눔, 사랑이라는 토라의 중심내용은 또한 신구약성경 전체를 흐르는 아주 중요한 맥입니다. 모세오경은 십계명의 주석입니다. 십계명에 관한 강해는 2주 동안 다룰 예정입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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