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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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출애굽기강해(15) -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곳에서

  • 관리자
  • 2017-01-31 0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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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곳에서(출애굽기 강해 15)
출애굽기 17:1-17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세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홍해를 건넌 뒤에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노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교회공동체가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쓴 물이 단물이 되다.

 

홍해를 건넌 출애굽공동체는 홍해에서 경험한 구원사건에 대한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수르 광야에 접어들었습니다. 광야는 척박한 곳이요,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더군다나 장정만 육십만 명이 넘는 대규모 이동이었으니, 서로 의지가 되기도 했겠지만, 인간생존의 기본인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의식주의 문제 중에서 인간을 가장 밑바닥까지 끓어내리는 것은 ‘식’의 문제입니다. ‘세 끼 굶으면 군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먹는 문제 중에서도 ‘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밥을 먹지 않고는 40일 이상도 견디지만, 물이 없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수르 광야로 접어들어 사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길을 걷는 동안 그들을 두렵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이들은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마라(쓰다)에 이르렀을 때 물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물은 ‘마라’하는 뜻이 암시하듯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은 또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제 목말라서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으니 모세를 원망할 만도 합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어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과 관련하여 물과 관련된 이적은 일곱가지인데, 물이 피가 되는 기적(7:20-25),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14:21-22), 홍해가 다시 합쳐지면서 적들을 삼키는 기적(14:26-29), 쓴 물이 단물로 바뀌는 기적(15:22-26), 바위에서 물이 솟는 기적(17:5-7), 물이 다시 바위에서 솟는 기적(민 20:7-13), 요단 강이 마르는 기적(수 3:14-4:24)이 그것입니다.

 

마라의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쓴 물을 단물로 변하게 하는 도구로 하나님은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쓴 물을 단물로 바꿀 그 신비한 나무는 어디에 있던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마라(쓴 물) 곁에 있는 나무였습니다. 그 신비한 나무는 먼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었으며,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의 일상에서 대하던 평범한 것들도 귀하게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에서 사용하셨던 빵과 포도주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늘 식탁에서 대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평범한 것들, 일상에서 늘 대하던 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자 그것은 곧 예수님의 피와 살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어찌 마라와 같은 위기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마라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위기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마라의 시간과 엘림의 시간

 

그들이 마라에서 물을 마신 뒤에 그리 멀지 않은 ‘엘림’이라는 곳에 이릅니다. 거기에는 물 샘 열둘이 있고, 종려나무도 일흔 그루나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마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입니다. 지금 마라에 있다고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쓴 물은 곧 단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엘림에 있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라의 시간은 곧 또다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라의 시간과 엘림의 시간, 이 둘은 통합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삶의 계기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라의 시간을 보낼 때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엘림의 시간을 보낼 때에는 감사함으로 받으며 엘림의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하며, 언제든지 마라의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라는 겸손함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홍해의 고비를 잘 넘겼고, 마라의 고비를 또한 잘 넘겼습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이번에는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 또 한번의 고비를 만납니다. 출애굽기 16장 1절에서는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가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둘째 달은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 이월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사용된 이스라엘 달력으로 두 번째 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애굽을 떠난 것이 구약의 달력으로는 첫째 달 십오 일이었던 유월절 다음 날이었으니(민 33:3), 신 광야에 도착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한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광야생활에 적응할 만한 시간도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그들이 출애굽 하여 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은 걸어서 사나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달 이상을 광야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도 이들은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광야에서 보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수르 광야에서는 목마름이 문제였다면 이제 신 광야에서는 굶주림의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애굽을 떠나오면서 준비했던 식량이 동나기 시작했고, 장정만 육십만 명이 넘는 이들이 먹을거리를 구할 방법도 딱히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멀쩡하게 잘살고 있던 자신들을 광야로 인도해서 죽인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불안이나 불만을 해결하고자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것을 ‘남 탓하기’라고 합니다. 조금 덜 성숙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기보다는 이전 단계로 물러섬으로써 불안을 완화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의 노예생활을 미화합니다. 16장 3절 말씀에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었던 때”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노예생활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채찍과 할당량에 치여 못살겠다고 부르짖던 노예생활의 실상을 왜곡해버리는 것, 이것이 그들의 비극입니다.

 

▪그럼에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역정을 내지 않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십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려주시는 것’입니다(16:4).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먹을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셨지만, 그것을 거둬들이는 책임은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점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지시지만, 이 지시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셨는데,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왜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하여 한 달을 살아보니 홍해도 만나고 마라도 만나고 배고픔도 만났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곳에서 하나님은 늘 도와주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니 불안한 것이지요. 그 불안함은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오고, 그래서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과 대조적으로 여섯째 날에는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거두라고 했음에도 거두지 않고,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가는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16:27). 이들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지요. 매일매일 그날 먹을 양식만큼 구했으니, 그날도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들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곳에서

 

이제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7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홍해, 마라, 만나와 메추라기, 그런데 이들은 또다시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물이 없자 또 불평합니다. 이번에는 모세에게 대들 듯이 달려들어 “물을 달라”고 합니다. 모세도 이런 백성에게 실망했는지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고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어떻게 할 방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17장 4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부르짖는 기도란 어떤 기도였을까요? 간혹,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을 미성숙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침묵기도가 부르짖는 것보다 더 성숙한 기도라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그것은 침묵기도가 되었든 울부짖으며 드리는 기도가 되었든 모두 성숙한 기도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시점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은 응답도 신속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로 호렙 산에 있는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호렙 산이 어떤 곳입니까? 모세가 떨기나무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난 장소입니다. 모세는 그 반석에서 물을 마신 곳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이름 붙입니다. 맛사 므리바는 ‘다투었다, 하나님을 시험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부끄러운, 잊고 싶은 역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기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미화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잊힌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국정교과서를 통해서 근현대사를 미화하고자 하는 이들이 배웠으면 좋을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맛사 므리바를 기억할 때마다 모새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던 사실을 상기할 것이며,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들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할 것입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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