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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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출애굽기산책(14) - 모세의 노래

  • 관리자
  • 2017-01-18 06: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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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노래(출애굽 산책 14)
출 15:1-2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 광야로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보다 앞서 가시며(출 13:21)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알 스본 맞은 편 비하하롯 곁 해변 그늘에 장막을 쳤는데 애굽의 군대가 그들을 향해 옵니다. 지난 시간 ‘전화위복의 하나님’을 통해서 말씀을 나누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며(출 14:14),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1. 하나님은 그 길을 보고 계신다.

 

믿음장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보이지 않지만 보는 것처럼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홍해가 갈라지기 전에 ‘홍해바다에 난 길’을 미리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모세조차도 지금 홍해를 바라보면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두려워합니다. 이미, 열 가지 재앙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그 하나님의 능력이 얼만큼인지 아직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모세에게는 홍해에 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을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있음과 없음, 유와 무의 경계가 없습니다.

 

홍해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입니다. 절대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해사건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인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입장은,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갈라주셨다고 고백한 하나님은 누구냐? 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입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합리적인 이해의 범주 안에 들어오는 것,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신이 존재할 수 있는 확률은 고물처리장에 태풍이 불었는데, 이런저런 고물들이 연결되어 보잉 747기가 되는 것보다 낮은 확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들로만 이뤄지지 않으며,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을 뿐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의 영역에 들어와 갇혀있을 수 있는 존재가 절대자,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은 무조건 진리므로 일점일획의 문자라도 다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상반되는 이야기들과 서로 다른 이야기들에 대해서 해명하지 못하며, 성경이 이 시대에 주시는 메시지를 읽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무조건 믿어라!”,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강요는 더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무례한 포교방식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가 들어있느냐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입니다. 일면 맞지만, 자칫 성경의 모든 사건을 신화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고, 의미만 해석하다 보면 상황에 따라 성경이 재해석되어야 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야기들은 결국 상징인데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렌즈 혹은 창(窓)’이라고 생각합니다.

 

2. 하나님의 렌즈 혹은 창(窓)

 

홍해를 바라보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길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렌즈, 하나님의 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보입니다. 인간의 눈엔 앞에는 홍해, 뒤에는 자신들을 잡기 위해 달려오는 애굽의 병사들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창을 통해서 보면 홍해의 길이 보이고, 이 두려움의 상황은 곧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상황으로 변할 것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이 ‘미리 봄’이 곧 히브리서 11장 1절의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실상’처럼 보는 것입니다.

 

홍해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먼 훗날 가나안 땅에서 거듭 하나님을 확증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신과 심판과 회개와 구원’이라는 도식은 이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물론,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십시오.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흡사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멸망 당하기 직전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지도자들은 부패하였고, 권력이나 쥐었다고 가난한 이들을 우습게 여기고, 부자들은 권력에 굽실거리며 뇌물을 주고받고, 남북한은 서로 무기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고, 미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을 의지해서 난국을 극복해 보려고 하지만,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인데, 이미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모든 정책을 펼쳐나가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북한도 언제든지 선제타격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손을 잡고 강력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중국을 견제하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한반도는 본의 아니게 3차 세계대전의 화약고가 될 수 있는 위치에 끼어있는 상황인데, 게다가 탄핵정국이라 대통령도 없는 상황입니다. 거기에다가 반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군복을 입고 대형십자가까지 앞세워가며 불법한 일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을 매도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입니다. 나라야 이러든지 말든지, 정권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정치권,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이대로만!’을 외치는 부자들의 사치와 향략, 이러고도 망하지 않는 것이 희한하지 않은지요. 어쩌면, 여기까지가 인간의 눈으로 본 한국의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을 통해서, 하나님의 렌즈를 끼고 이런 상황을 보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에 개입하시며, 바로 잡아주시는 중이시라는 점입니다. 조금 더디 가도 정도를 걸어가자고 다독거리시며 끊임없이 희망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거리에 대형 십자가를 메고 나온 사람들처럼 드러나지는 않아도 이 세상을 밝힐 만큼, 기드온 삼백 용사만큼은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면 되는 것입니다.

 

3. 노래의 힘

 

오늘 우리는 <모세의 노래>와 <미리암의 노래>를 읽었습니다. 두 노래 모두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뒤에 부른 노래입니다. 노래의 힘은 무엇입니까? 슬플 때에도 노래를 부르고, 기쁠 때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노래를 함께 부른다는 것은 기억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추모하면서 광화문에서 문화공연이 열렸던 날 저녁, 광장에서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싸움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흐르는 눈물들…….’ 30년 전에 불렀던 노래인데, 이 노래를 다시 불러야 한다는 것이 못내 슬펐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처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지만 ‘노래를 함께 부른다는 그 이유’만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노래의 힘입니다.

 

모세의 노래에서 하나님은 ‘나의 힘, 노래, 구원, 용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힘, 노래, 구원, 용사는 모두 은유의 언어입니다. 이렇게 ‘은유’의 언어로 표현된 이유는,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경험이며, 그래서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일이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집회나 기도회에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열광적으로 기도합니다. 헌금생활이나 주일 성수는 물론이요, 성경 읽기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습니다. 이것을 서강대 철학과 교수이자 장로인 강영안 박사는 현실적 무신론 혹은 실제적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이라는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신앙생활의 외적인 모습은 잘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실제 삶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무신론입니다. 무신론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무신론입니다(p. 65)’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선 섬뜩했습니다.

 

최근 언론을 통해서 이런 사람을 자주 봐 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책을 들고, 기도하고, 십자가를 둘러매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에 서 있는 사람들,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다시 돌팔매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그들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우울해졌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렌즈, 하나님의 창(窓)’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결국 ‘긍정이요, 희망’입니다. 그러니 뭐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 다칩니까? 나를 돌아보면서, 내 신앙이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지요.

 

14절 이하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건너자 여러 나라가 듣고 떨었다고 합니다. 애굽은 물론이려니와 블레셋, 에돔, 모압, 가나안 주민이 너무 놀라서 ‘돌 같이 침묵(16)’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합비루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지켜야 할 기득권이 많은 민족입니다. 해방된 이스라엘이 그들이 기득권을 해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입니다. 약자의 해방의 기쁨 앞에서 함께 노래하지 못하는 기득권자들, 어쩌면 그것이 역사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숙명 속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찬송’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바다 위로 난 길을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길을 예배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손을 잡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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