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강해 8/ 출 6:1-9)
하나님의 명령으로 백성과 하나님 앞에 섰던 모세는 진퇴양난과도 같은 상황에 부닥치게 됩니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강제노역의 강도를 높이고, 백성은 모세와 아론 때문에 더 힘든 노역을 하게 되었다고 불평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탄식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런 탄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쫒아내리라(6: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 힘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한 곳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고난'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다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모세는 몇 차례의 망설임 끝에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명의식을 심어주시기 위해서라도 뭔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줘야 할 터인데, 오히려 일을 꼬이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 교육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부터 노예처럼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300년 이상(이주 이후, 130년 정도는 그냥 살았다고 계산해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노예생활의 습성은 대를 이어서 이어졌을 것이므로 단순히 장소적으로 출애굽하는 것만이 출애굽이 아니라, 노예적인 습성을 벗어나는 것이 출애굽의 참된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예적인 습성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밑바닥까지 경험해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는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속전속결로, 자신의 노력 없이 그냥 주어진다면, 출애굽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주체이시지만, 백성의 결단과 그들의 성숙이 뒤따라야 출애굽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보통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더 깊어지면, 그 '복'이라는 것이 반드시 인간으로서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때로는 말씀에 순종하므로 핍박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 핍박조차도 복이라고 고백하며 감사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불법이 판을 치고, 악한 권력과 거짓선지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에 '적당히'는 없습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하며, 우리가 구할 것은 선과 악에 대해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실천할 수 있는 용기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7-80년대 군부독재의 폭압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었지만, 그렇게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순간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불의한 권력은 분단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종북으로 빨갱이로 몰았고, 불순세력으로 심지어는 간첩조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반대자들을 회유하다가 안되면 암살하고, 거짓 종교지도자들을 내세워서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고, 신자들에게 현실 정치에 관해서 관심 두지 말고 오로지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해서나 관심을 두도록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7-80년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이들은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불의한 세상,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고난이 아니라 복된 길임을 또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의한 권력은 끊임없이 분열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자 곧 이스라엘은 가혹해지는 노역 때문에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서로 협력해야 할 사람들끼리 싸우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권력자들의 방법이요, 압제자들의 전형적인 통치방식입니다. 자기들은 멀찌감치 서서 싸움구경만 하고 싸우다 지치면 중재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을 반대하는 이들을 제거합니다. 권력에 중독된 이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잘못된 일도 옳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인격적인 주체가 아니라 개 돼지로 생각하지요.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불의한 이들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함께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또한 하나님의 믿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우리 국민이 지혜로웠던 것은 불법한 권력이 끝없이 국민 간의 이간질을 획책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올해 12월은 역사에 1987년 6월처럼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세상이야기, 정치이야기 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만 출애굽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지금 지배권력 바로에게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라고 하는 내용은 정치와 관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출애굽의 이야기 속에서 정치적인 내용과 신앙적인 내용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별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구나 정치경제문화 등과 분리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바로 정치경제문화의 문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정치의 문제, 경제의 문제, 문화의 문제 등을 하나님의 말씀을 캐논으로 삼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불의한 일들이 그 어떤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불의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이후, 유족과 4.16연대에서는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얼마나 부르짖었습니까? 그러나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과 보수단체에서는 유가족들에게 얼마나 많은 비난의 화살을 던졌습니까? 비난의 화살을 던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마치 남의 일처럼 침묵했습니까? 이런 일들이 정치적인 일들이라고 하여 침묵하면서 신앙인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한 것은 아닌지 회개해야 합니다. 더 밝혀지겠지만, 350명이 뒤집어진 배 안에 갇혀서 죽어가던 시간에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도 머리 손질이나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입니까? 그런데도 그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탄핵을 앞두고도 당당하게 탄핵을 당해도 자기의 직무를 다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회청문회에는 증인으로 채택된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참석하지 않고,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국민을 끝없이 분열시키려고 하고, 조금의 틈만 보이면 다시 반격하겠다고 칼을 갈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교통 딱지 하나만 경찰서에서 날아와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국민과는 상관없는 '법'이 가진 자들만의 법인가 싶습니다.
정의로운 권력은 국민을 하나로 만들지만, 불의한 권력은 끊임없이 분열시킵니다. 노예들의 땀 흘림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바로, 그는 강제노역의 강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분열시켜 모세와 대립하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완악한 마음까지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단지 그가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사건들은 대한민국의 환부를 드러내는 일이요, 이 일을 통해서 새살이 돋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봅니다.
*언약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신 까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기억하게 된 까닭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르짖음과 아우성이 발단이 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기억은 하나님 행동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요청 이후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셨고, 행동하셨다(역사하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창세 전부터(엡 1장) 가지고 계시지만, 저절로 이뤄가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고 응답하는' 능동적인 이들을 통하여 그 계획을 이뤄가신 가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부르짖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저절로 이뤄주실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일에 힘쓰라는 말씀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부르짖습니까? 지금 여기가 좋은 사람들, 살만한 사람들은 부르짖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무엇을 하시고자 한 것입니까?
7절 말씀에 1) 내 백성으로 삼고 2) 너희 하나님임을 알게 하고 3)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7절의 말씀에 있는 대로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6:7)”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특수 계약 관계가 체결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이것을 ‘양자의 언약’이라고 하는데, 해방은 구원자가 구원받는 자에게 요구하는 책임과 연결이 됩니다. 즉, 이 특수 관계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성실한 답변이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억압으로부터 구원받은 이는 다른 이에게 억압자로 군림할 수 없다,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이들은 다시는 노예 생활로 돌아갈 가능성을 차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전하는 모세의 말을 거부합니다. 9절에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일하시고자 하지만, 거부하는 인간상을 보게 됩니다. 현실적인 문제에 몰입된 이스라엘을 봅니다. 이전과 달리 짚 없이 벽돌의 할당량을 다해야 하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에 짚을 주고 벽돌을 만들 때가 훨씬 더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덜 힘들어진들 이스라엘이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제노역이 굳어지고 영원히 노예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이유는 이 지긋지긋한 강제노역으로부터 해방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노예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들은 해방될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 강한 그의 팔을 들어 구원을 베풀어주시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구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 정치적이며 세상적인 해방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의 구원이란 ‘해방’이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억압자에 대한 심판도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시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해방 받은 자의 하나님이 되고, 해방 받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노예상태로부터 온전하게 해방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면서 완성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