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의 하나님
출애굽기 2:11-25/2016년 10월 27일 수요성경공부
출애굽기에는 억압의 대행자와 구원의 대행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왕이나 바로 왕의 명령에 따라 히브리 노예를 감독하며 부역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목숨을 걸고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공부한 바대로 그들은 여성이었으며 재미있는 것은 그런 결단을 할 때에 남성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한다는 점입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아 부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누이 미리암, 바로의 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두 여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불행한 것은 그 여성 한 분이 국가통치권자인 현직 대통령이라는 점과 국가통치권자의 머리에 앉아서 교주 역할을 한 것은 욕심 많은 강남 아줌마였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두 분의 뜻을 받들어 그들이 마음껏 대한민국을 주무르게 하는 데 이바지한 이들은 정치권뿐 아니라 종교계까지 총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진실을 밝힐 생각도 없고, 그동안 망발과 망언에 가까운 발언으로 박 대통령을 찬양했던 교계의 목사들이 회개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첨가 : 결과는 2017년 3월 대통령 탄핵과 구속으로 이어졌습니다)
출애굽의 서막을 열어가는 여성들과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여성들이 제대로 서야 역사도 바로 선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바로 서야 가정도 바로 서고, 교회도 바로 섭니다.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남성인 것 같지만, 실질적인 주권은 여성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1. 모세의 운명이 갈리는 지점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어 왕족이 받는 교육을 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모 역할을 했던 어머니 요게벳은 어린 시절 끊임없이 히브리적 정서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한 사람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왕궁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누리면서도 히브리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상황을 출애굽기에서는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라고 표현합니다. 모세가 본 것은 자기의 형제들이 고역에 시달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어지던 고역이 모세가 성장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강제노역, 노예 노동의 특색은 자기 결정권이 없으며,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노예 노동의 현장에는 죽지 못해서 일하는 이들이 있고, 권력자들의 명령을 따라 그들을 감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집회현장에 나가보면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나와 있는 경찰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해가 가면서도, 너무 열심히 자발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경찰을 보면 밉습니다. 물론, 잘못된 주장을 하는 불법집회라면 그런 열심을 고맙게 생각하겠지만,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국민의 소리를 억압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납니다.
모세는 노예 노동의 현장에서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 곧 자기의 형제를 치는 것을 보고 격분합니다. 그래서 그 사건에 개입했고,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를 죽여 모래 속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동족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또 개입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자신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재판관과 다스리는 자는 오직 왕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설마, 나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합니다.
결국,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숨어듭니다. 미디안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자손과는 먼 혈연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광야의 어느 우물곁에서 그는 또 다른 갈등상황을 목격합니다. 성서에 ‘이 우물’이라고 표현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어느 우물이 아니라 ‘이 우물’이라고만 말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잘 알려진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물이 있는 곳에는 마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모세가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고 하는 것은 마을 한복판에 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그곳에서 목격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양 떼에 물을 먹이려 하는데, 뒤늦게 당도한 남자 목동들이 그 여인들을 내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이 도망자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로 또 그 일에 개입합니다.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현장에 개입하고,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데 개입하고, 또 남자 목동들이 여자 목동을 괴롭히니 개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성격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마음 혹은 정의를 세우려는 용기’입니다. 이런 마음, 이것이 모세의 운명이 갈리는 지점입니다.
사람들은 불의한 일을 보고도 그 일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연루되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불의한 일들을 볼 때마다 개입했습니다. 그런 모세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2. 연약한 자,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
잠언 19장 7절 말씀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곧 ‘연약한 자’입니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가장 큰 폐해는 ‘연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실패자’로 규정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풍토입니다. 거기에다가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극히 물질적인 것으로 한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맘몬이요 사탄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겪는 이 아픔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모든 것이 ‘물질과 권력’을 향해 있습니다. 기본적인 상식도 없고,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보통의 사람들도 비정상이 되어 그들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지지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세상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끊임없이 약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약자의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의 곁에는 늘 가난한 이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들을 선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이 당연한 삶인데, 하나님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선대하시겠다고 하시니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2장 23-25절에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르짖었다’라고 해석된 히브리어 ‘차아크’는 ‘처절한 외침’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은 히브리어 ‘샤브아’인데 결국은, ‘자아크’와 ‘샤브아’가 하나님을 움직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그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자 하나님은 무엇을 기억하셨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기억으로 말미암아 출애굽의 사건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연약한 자와 고통받는 자,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계절입니다. 우리 한남교회가 이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 꿔 드리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많이 하는 한남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을 기억하라
“잊혀진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의 부르짖는 소리와 아우성을 들으시고는 그들과 세운 언약을 기억해 내셨습니다. 기억의 회복, 이것이 출애굽 역사를 만들어 가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려면, 새로워지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게 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짖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억을 떠올렸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는데 인간들이 잊어서 애굽의 노예생활과도 같은 삶을 자청해서 살아가는 듯합니다. 보십시오. 스스로 물질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과 물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하는 뻔뻔한 정치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야 그렇다고 해도, 소위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마음이 없다면. 그들은 더는 목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목사들은 교인들이 회개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그런 목사들의 설교에 “아멘!”하고 화답하면서 그들이 지속해서 거짓선생으로 살아가게 한다면, 소경의 손을 잡고 지옥으로 가는 소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
여러분의 삶,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작은 일에도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개인적인 출애굽의 삶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