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살림의 일꾼 -여성
출애굽기 2:1-10/2016년 10월 20일 수요성경공부
앞에서 우리는 히브리 산파의 믿음을 통해서 출애굽의 역사가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부르짖음과 아우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면서 동역자로 여성을 불러주신 이유는 가장 낮은 삶을 살아갔던 이들이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왕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책무를 잘 감당했음을 공부했습니다.
이번 주에도 역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의 어머니, 모세의 누이, 바로의 딸이 등장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요게벳으로 ’여호와는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입니다. ’고상한 백성‘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 관하여 성경은 지극히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그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을 낳았다”(민 26:59)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 모세를 낳았을 때, 요게벳이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히 11:23)
출애굽기 2장 2절에 ‘잘 생긴’이라는 단어와 히브리어의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토브’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시고 “참 좋다!”하실 때 “좋다”라고 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도 왕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믿음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도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1.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는 여성
여성은 ‘생명을 잉태’하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생명창조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여성을 부르시어 창조의 동역자로 삼아주실 때에,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노동과 해산의 고통은 저주처럼 묘사되었지만, 노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해산은 하나님께서 여성을 통해 인간을 창조하시는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노동하고 잉태함으로 창조의 동역자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맹자의 명심보감에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不 아닐(불) 忍 참을(인) 之 갈(지) 心 마음(심) ‘남의 불행을 참지 못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남의 불행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저개발 국가 어린이의 사진을 보고 가슴이 찡해지는 것이나 고통에 빠져 절망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착한 본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불인지심(不忍之心)]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눈물이 많은 이유는 남성들에게 비해 ‘불인지심’의 마음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은 ‘생명중심의 사고’와 연결됩니다. 믿음으로 모세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요게벳은 갈대 상자에 역청과 나뭇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에 담아 나일 강가에 흘려보냅니다. 조금이라도 이 아이가 생명을 연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갈대 상자가 어떻게 되는지 강을 따라 쫓아갑니다. 이 역시도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왕의 딸 역시도 갈대 상자에 떠내려온 아이를 보자 ‘측은지심, 불인지심’을 느껴 그를 거두어 키웁니다. 2장 6절 말씀에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불인지심이요, 측은지심입니다. 여성들에게는 이 마음이 남성들보다 더욱 깊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살림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2. 생명중심의 사고 vs 물질중심의 사고
제국의 안정을 위하여 언제든지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은 여성들에 의해 차질을 빚게 됩니다. 바로의 딸은 위험을 무릅쓰고 히브리 남자아이를 살리려고 합니다. 생명을 차마 버릴 수 없어 거두어들이는 바로의 딸, 아기를 어떻게든 살리려는 아기의 누이와 어머니, 이 사람들이야말로 출애굽의 씨앗을 뿌리는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생명중심의 사고’였습니다. 이들은 나이가 다르고, 지위가 다르고, 문화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보편적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보편성 인간성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위험조차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은 우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살아가야 할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대는 이 마음, 보편적인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알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가 불행한 이유는 물질중심의 사고가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물질중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출애굽하는 길은 생명중심의 사고를 키우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생명중심의 사고방식을 키우고 확장하려면 우리는 생명의 신비를 봐야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흙’에 바탕을 두고 있고, 흙은 씨앗을 품고 키워냅니다. 이 생명의 신비를 본 사람들은 소박합니다. 소박하다는 것은 적은 물질을 가지고도 자족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흙을 만지며 자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품에서 자란 아이들, 자연의 신비를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품이 넓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연의 신비보다는 폭력적이고 퇴폐적인 게임에 열중하고 있으며, 공영방송에서도 보편적인 인간생활을 담은 드라마보다는 자극적인 소재로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에 길들면 보편적인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생명살림의 문화선교를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서 ‘생명살림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3. 생명 살림은 작은 일로부터
모세가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은 때에는 불과 석 달 밖에 안된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라 장성하게 되었고, 출애굽을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된 것과도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출애굽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살림의 일꾼인 여성들의 마음들이 긴밀하게 작용하면서 출애굽의 씨앗은 자라게 된 것이요, 마침내 커다란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희망의 씨앗이요,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고,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작은 것이라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작은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큰 역사를 이뤄가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가치판단에 따른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누지 않으시고, ‘과부의 두 렙돈(막 12장)’ 같은 예물을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헌신하는가?”이지, ”얼마나 드렸느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는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이요, 마몬이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마치 바로 왕이 자신의 체제를 위해서 “어린 남자아이를 죽여버리라!”고 해도 반기를 들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얻으려 하고, 물질을 얻으려 합니다. 그 얻은 물질과 권력으로 선한 일을 할 생각은 없고, 오로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선한 일이 아니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도 싫어하시는 일이요, 이런 사람들이 판을 치면 권력 밖에 있는 이들과 억울함을 당하는 이들의 사무치는 아우성과 부르짖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어 바로 잡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때에는 반드시 동역자를 부르십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 함께 공부하신 내용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들어오실 때에 먼저 ‘여성’을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내용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늘 동역자를 불러 일하시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어떨까요?
이 시대 역시도 하나님은 동역자를 불러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교회를 불러 일하시고, 사람을 불러 일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한남교회가 되길 바라고,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려면 대단한 사람이어야만 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측은지심, 불인지심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기에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