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수요성경공부

산상수훈(29) - 권위 있는 가르침/마지막회

  • 관리자
  • 2016-10-05 07:48:00
  • hit621
  • 222.232.16.100

권위 있는 가르침
마태복음 7:28-29/2016년 10월 5일 수요성경공부

 

산상수훈 마지막 회입니다.

봄이 막 시작되던 지난 3월 초에 시작한 산상수훈강해를 10월 초, 깊은 가을에 마감합니다(인쇄본을 마감하는 시기도 봄이 막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출애굽기 산책이 30회 예정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귀로 듣고, 눈으로 읽은 말씀이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로 맺혀지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던 시대는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기였고, 로마의 황제는 신과 같은 존재였으며, 모든 이들은 로마황제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 시대였습니다. 인권의 침해를 말할 필요도 없었고, 더군다나 로마의 식민지를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대다수 민중은 이중적인 착취를 강요당하며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모세의 율법에 바탕을 둔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강요하며, 그들을 죄인 취급했고, 그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1. 산상수훈의 권위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은 하나하나 혁명적인 말씀이었던 것이요, 인권선언이요, 이전에 그 어떤 이들이 전하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권위가 있는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산상수훈을 읽는 사람은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 길을 꾸밈없이 가르치시면서,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짐을 약속해 주는 말씀을 그 누구가 거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교훈의 내용은 지극히 조용하면서도 혁명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라는 8복의 말씀을 읽지만, 이런 표현 자체가 사실은 구약의 전체 교훈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로마제국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로마 황제 한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이 노예가 되는 것을 정당화하던 수천 년의 역사, 지배자와 강자가 역사를 이끌어 온다고 철석같이 믿던 시대, 그 누구도 이 흐름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가난과 온유를 가르치고 봉사와 희생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힘의 세계와 역사 속에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교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밖에는 이뤄질 수 없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경쟁사회와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도 이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좁고 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좁고 험한 길이야말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놀라운 은총과 은혜의 경험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이런 점에서 권위가 있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28절 말씀에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 이전, 누구의 가르침과도 달랐던 예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놀랐던 것입니다.

 

2.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옛날 중동에서는 글을 배우는 데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으므로 서기관은 학자이거나 관리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나라의 매우 높은 관리를 서기관이라고 했습니다(삼하 8:17). 종교적인 율법이 유대인들의 생활에 점점 더 중요하게 된 포로기 이후에는 전문 교육을 받고 임직한 유대교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기관의 임무는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오경이 시민 생활을 위한 율법 모음집으로 통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학자들은 법률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고, 지도적인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우두머리들이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촘촘히 짠 율법 규정의 망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떤 경우에라도 어기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해석하는데 능했고, 그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하는 데는 능했지만,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가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왜곡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비난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산상수훈에는 그들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 주여 주여 하는 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을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던 불법한 자들(마 7:15-23)’이 누구인지 바로 알았습니다. 대놓고 비판을 당하던 당시 권력에 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를 갈았을 것이고,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으며, 그를 따르던 이들은 환호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삶을 얽매고 있었던 가장 큰 적은 ‘로마제국’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메시아란, 로마제국에서 자신들을 해방하여 다윗왕국의 영화를 회복하는 분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서기관들 역시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에 영합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진실성이 없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잠언 4:27),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셨던 것입니다.

 

3. 말씀의 권위는 예수님의 삶으로부터 왔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는 이 본문이 이렇게 해석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무리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한 번도 이런 가르침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예수께서 자기가 말한 그대로 살고 있음이 분명했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 교사들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권위 있게 다가간 이유는, 그가 말씀하신 그대로 살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지켜본 종교 지도자들은 ‘말 따로 행동 따로’였으며, 그나마 말씀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훼손했습니다.

 

말씀의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실천입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권위가 있으려면 설교한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인들에게만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 아무리 설교를 해도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면 권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살지 못할 뿐더라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면, 그들은 거짓 종교지도자들이요, 불법한 자들이요, 주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모르는 자들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 종교지도자들이 득세하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토록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된 시대는 없었을 것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혹하면 안 됩니다. 귀로 듣는 것에만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으로 살아가면서 고뇌하는 신앙, 그것이 깊은 신앙, 권위 있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이요,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려면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삶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그 말씀의 진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그 말씀의 진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이 하나 둘 쌓이면서 우리의 신앙도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영의 눈(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영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신비로운 현상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어느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열심히 악인들과 동행하며 그들의 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잘못된 것임을 알았을 때에는 너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는 복음의 진수가 들어있습니다.

산상수훈만 잘 익히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에도 사실은 벅찹니다. 많은 성경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모든 말씀은 이 산상수훈의 주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은 삶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그 말씀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여러분의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신다면, 충분히 우리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의로운 일이기에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마 5:10-12).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드러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