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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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산상수훈(25) - 좁은 문, 좁은 길

  • 관리자
  • 2016-09-07 0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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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좁은 길
마태복음 7:13-14/ 2016년 9월 7일 수요성경공부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동해에 가려면 구불구불 2차선 국도를 타고 령(한계령, 미시령, 진부령, 대관령) 중 하나를 선택하여 가야만 했습니다. 자동차로도 5시간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도로도 넓어졌지만, 미시령 터널이 생기면서 절반의 시간이면 동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대신에 우리는 천천히 가면서 국도변에 펼쳐진 풍경과 구불구불한 령을 넘어가면서 바라보던 설악산의 풍경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에 내비게이션까지 보편화하면서 운전자들은 좁은 길이 주는 아름다움을 잃었습니다.

경쟁사회에서는 누가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도착하는 사람을 승리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지름길을 제시하고, 많은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이 남들이 다 걸어가는 그 길을 걸어갑니다.

 

1.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경쟁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마치 신앙생활에도 쉽고 확실한 공식이 있는 듯 편리하게 빨리 이르려고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마태복음 7장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가는 자가 많고”라는 구절을 “하나님께 이르는 지름길을 찾지 마라. 세상에는 여가를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하는 인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쉽고도 확실한 공식들이 넘쳐난다.”고 번역했습니다. 신앙은 ‘여가’를 활용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부’를 드려서 이루려고 해도 다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삶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신앙’과 ‘삶’을 별개로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신앙과 삶을 별개로 생각하다 보니, 일상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에만 전념한다고 합니다. 혹은 교회에 나와 있는 시간에만 신앙인으로 살고 사회에 나가서는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오히려 윤리적으로도 더 타락한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기도를 하면 자신들의 죄가 다 용서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앙과 삶의 분리, 이것을 당연한 것처럼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악행이 만연한 세상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대다수 사람이 그저 편안하게 걸어갈 길이 아니라,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걸어갈 수 없는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메시지』에서는 14절의 말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는 말씀을 “대다수 사람이 그런 말에 속겠지만, 너희는 속지 마라. 생명,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갈 수 있는 힘든 길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여가, 남는 시간에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받길 원하고, 거짓 교사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현혹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여가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드려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쉽지 않기에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2. 바보가 되십시오.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논리에 익숙합니다. 다수의 의견이 곧 진리가 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수 의견’은 무시되기 마련이고, 이런 사회풍토에서 ‘대다수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다수 사람이 “예!”라고 하는 현실에서 “아니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더군다나 그 때문에 어떤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면 더더욱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대다수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아닌 좁은 길을 걸어갔던 소수에 의해서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을 압니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면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면 길가에 피어난 수없이 많은 풀꽃과 곤충들과 동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같은 길을 갔다고 하더라도 자동차를 타고 질주한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을 걷는 사람은 봅니다. 이것이 느릿느릿 삶이 주는 묘미입니다. 길을 걷다 마주친 모든 것들 때문에 그 사람의 삶은 깊어집니다. 때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오로지 걷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기꺼이 편리한 자동차를 포기하고 걷는 것을 선택합니다.

 

신앙의 길도 그렇습니다.

좁은 길, 좁은 문을 선택하게 되면 당장에 불안합니다. 다들 저 길로, 저 문으로 가는데, 이 길이. 이 문이 맞는 것일까 불안합니다. 그러나 이내 그 길과 문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과 문이므로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세상이 악하면 의인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악한데도 의인을 자처하는 자가 승승장구한다면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그 어떤 세상에서도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그들의 승승장구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승승장구가 분토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그들과 같은 길에 서 있지 않음에 감사하고, 자신들이 걸어가는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기에 손해를 볼지라도 그 길과 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이 대로를 선택하고 넓은 문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요, 바보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바보가 되길 권합니다.

그렇게 살아도 충분하고,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28편 1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대로를 걷고 큰 문을 추구하는 자들은 잘 되야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선택한 이들은 생각하지 못하던 선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우리의 일상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2003년부터 2013년까지 10년 동안 야생화에 빠져 살았습니다. 남들이 만나지 못한 야생화를 만나려면,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남들이 걷지 않은 길에서 만난 야생화가 주는 기쁨도 크지만, 이미 남들이 걸어간 길에서 보물찾기하듯 먼저 간 이들이 만나지 못한 야생화를 만나면 그 기쁨도 큽니다. 그런데 제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야생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의 뒤만 따라다니다 보면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겠다는 고민이었지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신 후에 더 유명해진 김영갑 선생이 제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습니다. 지금의 김영갑 갤러리가 있는 삼달리였습니다. 그분과 알게 되어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야생화를 주제로 사진작업을 하겠다고 했더니 “야생화는 똑같은 사진이 나올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목사님만의 특별한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대다수의 야생화 사진을 담은 분들과는 다른 시선을 가져야만 합니다.”라고 조언합니다.

 

고민 끝에 저는 야생화 애호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야생화를 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담은 것도 담았지요. 제 작업의 원칙은-1) 있는 그대로 담는다. 2) 잡초 취급당하는 것들, 못생긴 꽃들을 담는다. 3) 벌레 먹고 상처받은 것들을 담는다. 4)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난 것들을 담는다.-등이었습니다. 사진을 담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이것도 꽃이야?”라고 했지만, 남들이 담지 않던 잡풀들의 이름을 찾아주고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자 그 잡풀을 보려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찾아오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깊은 산에서나 만날 줄 알았던 꽃이 교회 앞 길가에 있으니 실망하시는 겁니다. 그때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귀한 것은 멀리에 만 있어야 하나요?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데 왜 우리는 그것에 무관심하고 멀리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둬야 하나요?”

 

신앙도 그렇습니다.

거룩한 신앙생활, 그것은 우리 일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더 어렵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인처럼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몹시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 신앙적인 결단을 해야 할 때에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에 눈 감아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이해관계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교분리를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을 보면, 그들처럼 정치적인 분들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좁은 길, 좁은 문’은 우리의 신앙을 일상화시키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일상으로 살아갈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란, 어떤 상상의 길과 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요, 문입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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