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수요성경공부

산상수훈(24) - 황금률

  • 관리자
  • 2016-08-25 07:34:00
  • hit690
  • 222.232.16.100

황금률
마태복음 7:7-12/ 2016년 8월 25일 수요성경공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어려서부터 ‘이웃사랑’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었지만, 자기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일’은 죄처럼 느껴졌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고행’과 가까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를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참고,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생활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1. 유년의 추억

 

어릴 적 어머니께서 겨울에 털모자를 하나 사주셨습니다.

너무 쓰고 싶었던 털모자라서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털모자가 따스한지 어떤지 머리에 쓰고 성에가 어린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창문 밖으로 걸인 하나가 잔뜩 몸을 움츠린 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밖으로 뛰어나가 그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뒤돌아 뛰어왔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기 교차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창 18장) 부지 중에 하나님을 대접했던 것처럼, 혹시 예수님이 걸인의 모습을 하고 내게로 오신 것일지도 몰라. 내가 털모자를 주었으니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선물해 주실 거야…….’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었습니다. 선행에 대해 복을 많이 받으려면 나만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는 모자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물론, 모자는 다시 생기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참 순수했던 유년의 시절이었습니다.

선행하려면 외식하는 자들처럼 드러내놓고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초등학교 6학년 성탄절 즈음에 교회친구들과 동네에 사는 불우이웃을 돕기로 하고 돼지저금통을 뜯어서 양말이며 장갑을 사서 문앞 우체통에 넣어두고는 골목길을 빠져나오던 순간의 기쁨 같은 것들은 제게 소중한 추억이기도 합니다. 그땐 사실, 저도 장갑도 없었고, 양말도 겨울이면 뻣뻣해질 때까지 빨지도 않고 기워 신어서 버들강아지 필 무렵이 되어서야 냇가에 앉아 까마귀 발을 씻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조금 특이한 어릴 적 추억이지만,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오늘 읽은 ‘황금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던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2. 먼저 자기를 대접하라.

 

자기를 잘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잘 대접할 수 없습니다. 결국, 내가 잘사는 것이 남을 잘 대접하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나를 긍정할 수 없는 사람이 남을 긍정할 수 없을 것이며, 자기가 복음에 흠뻑 빠지지 못한 채 남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이기적인 삶, 자신만 하는 삶을 살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순서를 정확하게 알자는 것이지요.

 

먼저, 나를 사랑한 후에 이웃 사랑을 해야 건강한 이웃사랑이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대접하십시오. 먼저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창조하신 귀한 존재야!” 이런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끔은 배우자나 자녀에게만 선물하지 마시고 자신에게도 선물도 하시기 바랍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5년에 한 번 정도는 적어도 10년에 한 번 정도는 자기에게 선물하면서, 잘 사아온 자신을 칭찬해 주십시오.

 

‘황금률’ - ‘변하지 않는 계명’, ‘가장 근본이 되는 계명’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남을 제대로 대접하려면 자기를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아직도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대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보다도 더 하찮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황금률과는 별개처럼 보이는 마태복음 7장 7-12절 말씀은 사실 자신을 잘 대접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 찾고, 하나님계신 곳에서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살인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데에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제물을 바친 후 하나님께서 재물을 받지 않자 가인은 분노합니다. 가인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왜 분해하는지 설명해 보아라.” 말씀하시는데, 가인은 대답하지 않고,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아벨을 살해합니다. 살인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이 먼저 있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죄가 그를 삼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잘 대접하려면, 그래서 이웃도 잘 대접하고 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유지해야 합니다. 그 증거는 바로 기도입니다.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기도한 내용대로 살아가기 위해 힘쓰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는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응답해 주심을 믿고 기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11절)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대접할 줄 아는 이들은 이기주의자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해방이 되어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남 좋을 대로 하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혹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공리적인 가르침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뭔가를 기대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때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에 도운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의 행동은 순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해조 씨의 『제목 없는 책』‘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는 글이 있습니다.

 

소와 사자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하고 혼인을 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매일 사자에게 풀을 대접했고, 사자도 또한 최선을 다해서 가장 맛있는 살코기를 매일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헤어지면서 하는 말, “나 네게 최선을 다했어!”였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최선은 최악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대접을 받는다면 어떤 대접을 받고 싶으신지요?

저는 무엇보다도 나의 존재를 존중받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강요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용서받고 싶습니다. 알게 모르게 내가 상처를 입힌 사람들, 내가 훼손한 피조물과 특히 건강하고 탄탄하게 만들지 못한 내 몸에게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교당하기 싫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겠습니까? 상대방을 존중하고, 용서하고,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쉽습니까? 몹시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탄식은 사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인지 알겠는데 살아보니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조차도 알지 못하는 무지에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대접하면 거기서 남을 진정으로 대접하는 힘이 나옵니다. 끊임없는 신앙의 훈련입니다.

 

4. 거듭남의 훈련을 하라.

 

우리는 신앙의 근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근육은 쉽게 단시일 내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꾸준히, 평생 우리는 신앙의 근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의 훈련입니다. 이 훈련을 해 본 이들은 압니다. ‘다 된 줄 알았는데, 거기에 서 보니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무지의 지’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는 것’이지요.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입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강아지지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하룻강아지 신앙’이라면,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브라질 리우올림픽이 얼마 전에 끝났습니다.

시간대가 달라서 많이 보지는 못했는데, 올해 제 눈에는 육상선수들이 참으로 멋져 보였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완벽한 몸매가 저런 것이구나 느꼈습니다. 울퉁불퉁 헬스장에서 보는 것 같은 근육질 몸매와 근육은 아니지만,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잔 근육으로 이뤄진 몸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의 몸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오랜만에 감탄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잔 근육, 특별나게 드러나는 것 없지만, 우리의 신앙을 형성해가는 중요한 실핏줄 같은 것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배우고, 읽고, 묵상하면서 깨닫는 작은 진리의 단편들, 그 말씀대로 살아가다 좌절할지라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신앙의 잔 근육들, 이것들이 연결되어 튼튼하고 건강한 신앙을 형성합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나를 진정으로 대접할 수 있고, 비로소 이웃도 더불어 대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