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마태복음 6:30-34/ 2016년 8월 10일 수요성경공부
이번 주일에 “기적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면서 2009년 5월에 타계한 고 장영희 교수의 수필 <열흘간의 고독>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가능성, 잘난 척하며 살던 장영희가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지만, 병을 통해서 더 겸손해지고, 조금 더 사랑을 배우고, 조금 더 착해진 장영희가 바로 오늘 성공적으로 함암 치료를 끝내고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날 수도 있다.’
‘오늘이라는 가능성’,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30절 말씀에도 ‘오늘’은 있었는데 ‘내일’은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 등장입니다. 들풀이 아궁이에 던져진 ‘내일’은 결국 ‘오늘’이라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오늘’을 정성스럽게 살아가야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 정성껏 먹고, 오늘 정성껏 만나고, 오늘 정성껏 공부하고, 오늘 정성껏 사랑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것에 정성에 다한다는 것, 그것을 종교적인 언어로 바꾼다면 ‘거룩한 삶’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정성껏 기도하고, 오늘 정성껏 예배하고, 오늘 정성껏 봉사하고, 오늘 정성껏 헌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할 수도 없으며, 내일 할 수도 없고, 오로지 오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의미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산상수훈(마 6:30-34)의 말씀을 요약하면 “지금 여기의 삶에 정성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1.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
오늘 읽은 말씀을 조금 더 쉽게 풀어보면,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오늘 정성스럽게 가꾸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들풀보다 더욱더 사랑하시며, 더 정성스럽게 우리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시는 분이시니 그분의 자녀인 이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모르는 이들(이방인)이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언제나 정성스럽게 ‘온갖 노력’을 다하시니 하나님이 실체가 되고,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삶에 흠뻑 젖어 살아가라. ‘라는 말씀입니다.
갓난 아가는 먹을 것, 일용할 양식을 위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는 것은 부모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온전히 믿고, 뭔가 결핍될까 혹은 놓칠까 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보입니다. 내일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을 미리 가져다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설령 ‘염려할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영희 교수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암 진단을 받았지만, ‘오늘’ 성공적으로 항암치료를 마칠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더 겸손해지고,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착해진 것으로 감사할 줄 아는 경지에 다다랐으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 모범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삶의 중심을 바꾸라!
많은 사람이 내일의 염려 때문에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제힘으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제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염려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삶이 중심을 ‘너’에서 ‘하나님’으로 바꾸면, 너희는 염려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삶의 중심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제힘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방인)이 구하는 것은 ‘소유하는 삶’인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입니까? 좀 더 쉽게 풀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중심이 바뀌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그 일에 온 정성을 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3절 하반절에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더하시리라‘는 ’더하기’입니다. 무엇에 무엇을 더하는 것일까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더하기)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입니다.
제힘을 의지하는 ‘소유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면, 가장 잘 되었을 때에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얻겠지만(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더하여 이방인들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덤으로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지만, 이런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소유한 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존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중심을 바꾸십시오. 오늘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 여기에 집중하십시오.
3. 자기답게 살자!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걱정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죽기 직전에 죽음을 예감하고 공포에 떤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다른 점은 그들은 죽음 직전에 본능에 의해서 그것을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본능적인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나운 개도 개장수를 만나면 본능에 따라 꼬리를 감춥니다. 그러나 주인이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꼬리를 치며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이 개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그렇지 않지요. 지금 당장에 닥친 일들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할 수 있는 복잡한 존재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삶의 근거를 바깥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삶의 근거를 외부에서 찾는 사람은 외부의 변화에 민감합니다. 조금만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오면 발끈합니다. 그러나 자기 삶이 근거를 안에서 찾은 사람은 외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안에서 자기를 찾습니다. 이것이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답게 사는 방법’입니다.
자존감이라고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자녀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공급자이시다.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온전히 집중하면,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은 그분께서 채워주신다.” 이런 신앙의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4. 하나님을 신뢰하라!
걱정과 근심의 속성은 하면 할수록 커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두 가지 짐승이 있다고 합니다. 긍정이라는 짐승과 부정이라는 짐승인데, 어떤 짐승에게 먹이를 줄지는 오로지 자시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삶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빠지게 되는 최악의 상황은 스스로 학대함으로써 이미 상처입은 것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본능에 따라 이러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염려’하는 상황을 제거해 주시지는 못하시지만, ‘염려하지 않고자 할 때’에는 적극 개입하셔서, 염려를 극복할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도 염려가 있고, 이방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염려도 없을 것이며,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면’ 이 모든 것들로부터 속박되는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언제,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오늘’에 집중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정성껏 하십시오. 오늘 정성껏 먹고, 정성껏 만나고, 정성껏 공부하고, 정성껏 사랑하십시오. 여기서 ‘정성껏’은 ‘많이’가 아닙니다. 음식을 정성껏 먹는다는 말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먹는 것이며, 정성껏 만난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이며, 정성껏 공부한다는 것은 일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요시한다는 의미이며, 정성껏 사랑한다는 것은 쾌락이나 향락을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깨달아 아시고, 흠뻑 빠져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