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신앙
마태복음 5:43-48 / 2016년 6월 22일 수요성서연구
테러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테러를 계획한 사람들은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기실 그들은 ‘힘’이 곧 ‘정의’라고 믿고 살아가는 자신들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사회적인 약자들을 희생제물로 삼을 뿐입니다. ‘나’ 아닌 ‘타자’에 대한 배려 없음, 무차별적인 혐오, 나와 생각이 다르면 곧 ‘악’이라고 규정하는 폭력적인 생각들은 때론 십자군적인 열정으로, 맹종적인 애국주의로, 악마적인 인종주의 형태를 띠고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있습니다. 자신은 ‘선’이고 타인은 ‘악’이라는 생각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선과 악으로 뒤엉켜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선과 악이 뒤엉킨 삶을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하는 사도 바울의 탄식,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지만 어느새 돌아보면 죄의 굴레를 지고 살아가는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일, 그것이 바로 ‘연약함의 영성’의 출발입니다.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악일 수도 있으며, 내게 자유가 남에게는 폭력일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라
악이 없는 선이 없고, 선이 없는 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남에게 ‘악’ 혹은 ‘악의 축’이라는 꼬리표를 함부로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에게 모든 책임의 꼬리표를 붙이고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개인주의 사회가 가져온 부정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관계성 속에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풍 가는 날 가뭄 끝에 비가 옵니다.
아이들은 하필이면 소풍 가는 날 비가 오냐며 투덜거리겠지만, 어른들은 가뭄 끝의 비가 반갑기만 하겠지요. 나만 생각하면 비가 안 오는 것이 좋지만, 전체적인 관계성을 생각하면 내가 좀 불편해도 비가 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성숙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심을 내려놓고,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자기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내리는 평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자기가 쓴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부패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신앙이란, 자기만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전체에 대한 통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에로부터 해방되어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할 때, 그는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악인도 불의한 자도 내 것이다.
요즘도 그런 말을 사용하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는데 80년대 이단이 창궐할 때, 목요 성경공부를 통해서 신도들을 현혹할 때 많이 하던 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 ‘마귀 새끼’라는 말이었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혹은 이단들의 모임에 나가지 못하게 하면, 사탄이 역사 해서 그런 것이라며 남편이나 자식이나 심지어는 부모에게도 ‘마귀 새끼’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곤 했습니다. 그런 논리를 따르다 보면 마치 마귀도 창조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마귀 새끼’라고 규정했으니, 그들을 멸절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신앙의 행위처럼 인식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악인도 선인도 의인도 불의한 자도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고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신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외면하고 싶은 말씀이고, 불편한 말씀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만, 이어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도 불의한 자도 아닌데,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원수처럼 지내지 않습니까? 더욱이 같은 하나님을 믿고, 한 교회를 섬기면서도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나는 조금의 잘못도 없고 상대방만 잘못된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원수도 불의한 자도 내 것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한 교회의 형제자매들끼리도 화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선과 악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입장에 따라 멋대로 가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선악의 판단은 그분의 일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선과 악의 경계를 긋는 일이 아니라 전체와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3.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전함’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온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말씀이었다면, 그 누구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그것은 그의 자비하심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이 품은 커서 그 안에 품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싸 안지 못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까지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감히 할 수 없는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함을 향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첫째로, 나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나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들이요, 한계를 품고 사는 존재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성서는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으며, 누가복음 17장 22절에서는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행여라도 나 때문에 누군가 신앙생활에 시험이 올까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말씀에 든든히 서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말씀에 든든히 서려면 먼저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읽고 생각하며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요, 말씀에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한 이단 사설들이 판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유혹이 대단한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도 유혹에 빠져 죽음의 길을 향해 갑니다. 자기들만 스올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데리고 함께 죽음의 길로 갑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정신을 차리고 “이 길이 아니야!”라고 하면, 그를 향해 손가락질합니다.
정말,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길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든든히 서야 하고, 그것이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걸음입니다.
셋째로,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원수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려놓음’, 이것이 그 시작입니다. 심플라이프, 미니멀라이프, 물건다이어트 등으로 표현되는 ‘비우기의 삶’이 요즘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늘 채우기 위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채우면 채울수록 소유한 것을 유지하느라 힘들어지면서 소유한 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 둘 줄여가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추구합니다. 맨 처음에는 불편할 줄 알았는데, 비우면 비울수록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를 향해 분노하게 되면 누가 가장 힘들까요? 원수나 박해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씀의 깊은 뜻은 ‘자기 사랑’과 맞닿아있습니다. 그 모든 미움을 내려놓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을 때, 그들로부터 입은 상처가 치유되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요, 마음만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온전한 신앙,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