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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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산상수훈(12) - 큰 사람이 되십시오

  • 관리자
  • 2016-06-15 07: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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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람이 되십시오
마태복음 5:38-42 / 2016년 6월 15일 수요성서연구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힘의 논리는 약육강식의 논리인데 어릴 적부터 제도교육을 통해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가설을 우리는 진리인 것처럼 배웁니다. 그러다 보니 ‘억울하면 힘을 키우라’고 합니다. 이 말은 ‘힘이 곧 정의다’라는 말과 통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의 동력은 자본, 곧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 사람보다 돈이 우선시 되는 사회,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 준비가 된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은 불의한 세상입니다. 이 말씀에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돈 없이 살 수 있을까? 힘없이 살 수 있을까?’ 반문합니다.

 

삶의 기본진리는 남의 생명을 해하지 않는 것이며, 힘으로 다른 생명을 억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의 가면을 쓴 야만의 세월 속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과 학살을 역사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종교의 이름으로 혹은 민주주의나 정의의 이름으로 약자들을 향한 수많은 혐오스러운 말들이 세상을 떠돌며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강자의 논리와 힘의 논리는 세이렌의 유혹처럼 강력한 유혹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유혹에 이끌리는 자들은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얼굴에 독수리의 몸을 가진 전설의 동물들입니다. 세이렌은 유혹 내지는 속임수를 상징하는데, 세이렌이 사는 섬에 선박이 가까이 다가오면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뛰어드는 충동질을 일으켜 죽게 만드는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이 암초와 여울목이 많은 곳에서 거주하는 이유도 노래로 유인한 선박들이 난파당하기 쉬운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세이렌의 노래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어서 수많은 남성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세이렌은 두 차례에 걸쳐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는데,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하여 부하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결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결박을 풀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이렌의 고혹적인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오디세우스는 결박을 풀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귀마개를 쓴 부하들은 명령에 순종하여 그를 더욱 단단히 결박하였고 마침내 세이렌의 유혹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 섬을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에 세이렌은 모욕감을 느껴 단체로 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뛰어난 음악가이자 시인인 오르페우스가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 아르고를 타고 항해하던 도중에 세이렌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맞대응하자 이에 모욕감을 느낀 세이렌이 바다에 몸을 던져 바위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경보(警報)를 뜻하는 사이렌(siren)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부분은 ‘세이렌의 운명’입니다. 누군가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면 자살한다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 힘의 유혹이 마치 세이렌의 유혹과도 같다고 했는데, 우리가 힘의 논리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 힘의 논리는 스스로 자살을 해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피에는 가인의 피와 라멕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폭력의 피를 거슬러 살아갈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래야만 합니다. 폭력의 피를 거슬러 살아가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그 폭력의 피를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을 저는 ‘큰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산상수훈의 말씀제목을 ‘큰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읽은 산상수훈의 내용을 살펴보십시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누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빼앗아 가는 자에게 겉옷을 주고, 억지로 오리를 데리고 가면 십 리도 가고, 구하는 자에게 무조건 주고, 꾸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정말 실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은 지킬 수도 없는 계명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십니까?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은 힘 있는 자들이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보다 약한 이들의 오른뺨을 때리고는 왜 왼뺨을 대지 않느냐고 겁박합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들은 부지기수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불의 앞에서도 저항하지 말고 순응하라는 말씀일까요?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적당히 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교훈일까요? 아마도 많은 분이 ‘적당히 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기는 것’ 정도로 이 말씀을 이해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적당한 신앙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적당한’이 아니라, ‘온전한’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씀일까요?

어떻게 속옷을 빼앗아 가는 자에게 겉옷도 주고, 억지로 오리 온 것도 억울한데 십 리를 가고, 지금까지 준 것도 얼마인데 또 구한다고 주고, 꾸어주었다가 떼인 돈이 얼마인데 또 꾸어줄 수 있습니까? 문자적으로 이렇게 실천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과는 다른 삶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힘의 논리,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를 진리처럼 믿지만,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허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를 깨뜨리기 위해 살아가며,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유인이며 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어떠한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자유인이요, 이 자유로운 삶을 아는 이가 곧 ‘큰 사람’이라는 가르침이지요.

 

폭력의 산을 넘으려면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보다 더 정신의 키가 커야 합니다. 폭력의 바다를 건너려면 폭력을 행하는 이들보다 마음의 더 넓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불의한 힘에 대하여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며,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눈은 눈으로 갚고, 이를 이로 갚으며 왼뺨도 치려 하며, 겉옷까지도 빼앗고, 동의도 구하지 않고 동행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구하고 꾸어서 상대방을 파산지경에 이르게 하지만, 너희는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저 침묵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불의한 힘에 대해서 폭력과 억압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고 명확한 입장을 표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명확하게 견해를 밝히고, 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폭력에 저항한다고 하면서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면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폭력을 종식하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입니다. 싸우되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싸우라는 몹시 어려운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이 힘의 논리를 깨뜨리려면 참으로 힘 있는 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의 어떤 힘에도 위축되지 않는 사람, 내면에 영적인 힘을 가진 사람, 끊임없이 낙관적인 자세를 가지고 삶을 밝게 살아가는 사람, 세상의 헛된 논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노심초사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당당한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 자기보다 약한 자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사람……. 이런 큰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는 ‘힘의 논리’는 강자중심의 논리요, 약육강식의 논리입니다. 그 유혹의 힘은 세이렌이 유혹을 능가합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명이란 ‘살아라!’ 하는 명령이요, 살기 위해서 우리는 강자중심의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을 관조하십시오. 거기에 빠져들지 말고 한 걸음 밖에서 바라보십시오. 세상을 관조하면서 끊임없이 영을 맑게 하는 일을 하십시오.

 

오늘날 세상의 힘의 논리에 빠져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것은 바보상자입니다. 바보상자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막장을 미리 경험합니다. 안방드라마가 히트하려면 기본적으로 막장이어야 하고, 그 드라마에 나오는 제품들은 최고가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 빠지는 사람들은 그것을 기어이 현실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이 바보상자의 힘입니다. 여러분, 바보상자에 빼앗기는 시간을 회복하는 것도 영성 생활입니다. 영성 생활이 어디 수도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에서 영성 생활을 할 때 그가 진정 큰 사람입니다. 영성수련을 위해서 초보자들은 산 위로 올라가거나 홀로 있지만, 이미 성숙한 영적인 경지에 다다른 분들은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영적 생활을 하며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법입니다.

 

큰 사람이 되십시오.

악한 자와 싸우는 자가 아니라 그를 회개시킬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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