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의 본질
마태복음 5:27-32 / 2016년 6월 1일 수요성서연구
1. 십계명은 구속의 법이 아니라 해방의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산상수훈은 십계명 중에서 제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생활에서 이끌어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으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구속의 법이 아니라, 진정한 해방을 위한 법입니다.
특별히 5계명부터 이어지는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은 노예생활에서의 아픔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계명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노역에 시달리던 상황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이 되었고, 노예들을 물건처럼 취급해서 함부로 죽임당하던 상황이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이 되었으며, 누이와 심지어는 어머니조차도 눈앞에서 지배권력에 강간당하는 현실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이 나왔고, 겨우겨우 노예생활을 하며 모은 재물을 도둑질하는 것은 이웃의 꿈을 송두리째 도둑질하는 것이기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만들어졌고, 지배자들의 입맛에 맞는 재판이 횡행하는 시대에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라’는 9계명이 나온 것이며, 지배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이웃의 아내와 집 모두를 강탈당할 수도 있던 상황을 경험한 이들에게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는 10번째 계명을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에 새겨서 주신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들 다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불행하게도,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 이런 일들은 반복되어 남왕국유다(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와 북왕국이스라엘(B.C.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로 분단되어 살아가다 노예로 끌려가고 서기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흔적조차도 없이 사라지면서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게 됩니다.
2. 제7계명은 왜 혁명적인 계명인가?
고대유대인들은 지옥에서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3부류로 구분했는데 첫째는, 사람들 앞에서 동료를 창피하게 만든 사람, 둘째, 동료를 무례한 별명으로 부른 사람, 셋째는 간음을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간음을 아주 커다란 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을 때 그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아야 했는데,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 살인, 간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간음은 아주 중차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간음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고대 근동의 간음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만 합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성적인 외도를 간음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오직 다른 사람의 아내와 성적인 접촉을 한 것만 간음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당시는 일부다처제로서 남자는 법적으로 여러 명의 부인과 첩을 둘 수가 있었고, 노예나 매춘부들과의 관계도 허락되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는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간음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우리가 성군으로 알고 있는 다윗도 역시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의 간음죄는 ‘단지’ 결혼한 경우에만 성립됩니다. 남성에게는 관대했고, 여성들에게는 아주 가혹했는데, 심지어는 남편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재산으로 생각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회적인 상황에서 간음죄는 개인적인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었고,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은 가정을 파괴하는 일로 이어지고,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 횡행하면 사회구조 전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가정은 생존과 치안의 기초였습니다. 힘없는 여성이 가정을 잃어버리면, 노인이나 힘없는 과부가 속한 가족공동체가 붕괴하면 그들은 생명을 위협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8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 그것을 빼앗으려고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라”는 9계명 등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살인행위나 다름없으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과 연결되고, 부모공경의 5계명도 결국은 가정공동체와 관련된 계명입니다. 결국, 살인금지와 마찬가지로 이웃과 그 가족의 생명을 보장하는 일이 이 계명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간음을 신성화 하거나 관습화했고, 심지어는 종교화했습니다. 사원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여사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거룩한 창녀들’이었고, 남자 사제들은 ‘남창’들이었습니다. 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은 그들 삶의 근거지로 이들이 신봉하는 것은 ‘생산력’이었습니다. 그 생산의 힘을 상징하는 것을 그들은 ‘성적인 접촉’으로 보았기 때문에 제단에서 여사제 혹은 남사제와 성적교접은 당시 예배의 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시리아에는 이 풍속이 남아있는데 ‘아달축제일’이 되면 여성들은 자진하여 거리에 나가서 창녀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가히 혁명적인 계명입니다. 십계명 하나하나는 모두가 그 당시 고대 근동의 지배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적인 내용입니다. 노예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지배권력이 강요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절실한 계명입니다.
3. 예수님은 계명의 본질을 묻고 계신다.
그런데 이제 이 계명의 본질은 어디로 가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지켜지지 않고, 오로지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변질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인을 예수님 앞에 잡아옵니다.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죄는 물론 ‘간음죄’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있던 이들은 당시 간음죄로 규정하고 있던 즉, 유부녀와의 성적인 접촉만을 간음죄라고 했는데 이것조차도 지키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간음을 모든 음행으로까지 확대하십니다. 이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던 유부녀와의 간음뿐 아니라, 모든 음란한 행위들과 모든 사악한 각까지도 금지하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 부분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했고, 청교도들은 이것을 근거로 새로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어 인간을 억압하는 실마리가 됩니다. 영국에서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계명에 대해서는 깊이 이해하고 있지도 않고, 목사들조차도 이 계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성적인 범죄 정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에게는 제도교육에서조차도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하지 않는데다가 종교적으로도 이성에 대한 성적인 관심을 모두 ‘간음’으로 치부해 버리니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죽은 율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그 죽은 율법, 문자에 얽매여서 성 소수자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이끌어줄 생각을 하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혐오만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혐오를 부추기고, 자신들의 음행은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는 광범위한 성적문란사회요, 간음을 강요하는 세상입니다. ‘성의 상품화’가 그 대표적입니다. 화장품 선전에 여성이 나오는 것이야 이해된다고 해도, 자동차 선전이나 박람회 같은 곳은 물론이고, 무슨 무슨 미인대회 같은 것들 역시도 모두 ‘성의 상품화’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이 계명을 적극적인 계명으로 바꿔보면 계명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성적인 탐욕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네 몸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누구의 몸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계명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적인 접촉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사랑은 탐욕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숙명은 욕망과 탐욕을 껴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게로 향하는 사랑만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을 떠난 인간의 숙명, 그것은 욕망과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어두운 계단을 걸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원과는 먼 삶의 방식이지요.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곧 이웃사랑이요, 이웃 사랑은 곧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귀중한 존재로 자각하는 사람은 타인 역시도 존귀한 존재임을 압니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위해 희생시키는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