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말
마태복음 5:21-26 / 2016년 5월 25일 수요성서연구
혹시 ‘욕’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도박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운전할 때라고 합니다. 특히 운전할 때, 험한 일을 당하면 자기도 모르게 비속어가 입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교통사고가 나서 다투는 현장에 가보면 사고의 원인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막말 때문에 감정싸움을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세상소식을 듣다 보면 기가 막힐 일들 앞에서 ‘나쁜 놈들’이라는 말이 절로 입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 기독교신앙을 가진 이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대로 욕설했으니 지옥불에 들어가야 하는지, 살인을 한 죄를 범한 것인지, 설마 욕을 했다고 지옥에 가거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지. 나쁜 놈에게 “나쁜 놈!”이라 하면 그것도 욕인지. 이런 경우는 예외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1. 언어생활의 중요성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을 담을 뿐 아니라, 말한 대로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려 훈련하여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선한 말,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한마디의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그 원인 중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이 ‘말에 의한 상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살한 많은 사람 역시도 말의 상처가 원인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은 ‘생명을 살리는 말’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형제에게 노하여 욕을 하는 것’과 ‘살인’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말만 그럴듯한 것이 아름다운 말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말’이란 입술을 통해서 나오는 것만 ‘말’이 아니라, 삶도 말입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서 누군가 깊은 상처를 받는다면 우리는 생명을 죽이는 말을 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시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2. 제6계명의 ‘살인’의 의미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마태 5: 21-26)은 형제에게 노하고 라가라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제6계명인 살인죄를 범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과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6계명의 실천을 ‘화해하는 것’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수동적인 계명을 “화해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으로 말씀하시며, 화해하는 삶이야말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6계명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듣기에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군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간단하지 않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군인뿐 아니라, ‘누구든지 어쩔 수 없이 살인해야 하는 경우 그것이 제6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는가?’로 확대하여 해석해 보면 그리 간단치 않은 계명입니다. 낙태나 안락사, 사형제도 등과 연결되면 더 복잡해집니다.
구약성서학에서의 일반적인 학설에 의하면 제6계명이 의미하는 살인은 모든 살해행위를 포함하지 않고, ‘승인받지 못한 즉흥적인 살인, 또는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고대 유대인 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승인받은 살인’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고의로 죽인 자, 어린이를 다른 신에게 바친 자 등과 같은 특정한 죄에 대해 특정한 ‘죽임’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고의로 죽이지 않은 살인자’를 위해서는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도 ‘불의 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 학자는 이 같은 전통적인 주장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살인에 대해서 크뤼제만은 고대 히브리어를 분석한 근거로 제6계명에 사용된 동사 ‘rsh’는 폭력을 사용하여 인간을 죽이는 것에 사용한 점에 주목하면서, 신명기 22장 26절에 ‘처녀를 강간하는 것과 살인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이란,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행동뿐 아니라 ‘삶의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는 의미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는 행위’를 조금 어렵게 표현한다면 ‘존재론적인 살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6계명을 좀 더 쉽게 풀면 ‘그 영혼을 죽이지 말라’ 내지는 ‘존재론적인 살인을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3. 제6계명의 적극적인 해석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두고 형제에게 화내지 말고 욕하지 말며 화목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단지 형제에게 되도록 화내거나 욕하지 말고 그들과 잘 지내라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살인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노하고 욕하다가 살인까지 갈 수 있으니 아예 그러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의 핵심은 형제에게 그들의 무엇 때문에 욕하거나 노함으로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곧 그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요, 그것이 곧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제6계명은 ‘영혼의 살인 곧 존재론적인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론적인 살인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재론적인 살인을 이해하려면 ‘소외‘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외란, ’분리 되었음‘, ’단절 되었음‘ 또는 ‘화해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외란 성서의 용어는 아니지만, 죄와 연결이 됩니다. 성서에서의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한 일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 내면의 관계에 분열이 왔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인간들에게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에덴의 동쪽에 살아가는 이들은 소외(죽음의 두려움)를 극복하기 위해서 술이나 마약, 신비주의나 주술적인 종교 등에서 얻는 도취 현상에 몰두하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스포츠, 레저, 취미 등 각종 동호회의 구성원이 되고, 정당이나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SNS등에 몰두하는 것은 원초적 소외감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 중 하나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두려움 중 하나는 ‘소외’입니다. 잊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은 곧 존재론적인 흔들림입니다. 존재가 흔들리게 되면, 삶의 가능성이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형제에게 노하고 욕을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했다는 것은 곧 그를 소외시킴으로써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기에 살인과 맞닿아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형제를 소외시키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 줌으로 단절된 관계들을 회복시킬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걸어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생명을 살리는 말. 이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형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의 적극적인 해석은 “존재론적인 살인을 하지 말라, 소외시키지 말라”는 뜻이며, 이것이 곧 ‘이웃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함으로써만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서로 화해를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생명과 맞닿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말, 그것은 사랑입니다.
아시는 대로 사랑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완벽한 사랑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사랑을 닮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래야 서로에게 사는 길이 열립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상처를 받습니까?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긴밀하게 연결된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가족이나 신앙공동체 같은 곳에서 우리는 사실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깊은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엄마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자녀를 학대합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겠지요.
혹시 가족 때문에, 교회 구성원 때문에 아프십니까?
먼저 내려놓고 다가가십시오. 품 넓은 신앙을 지켜 가십시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말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