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법과 율법
마태복음 5:17-20 / 2016년 5월 18일 수요성서연구
교회 뒤편에 작은 텃밭이 있습니다.
콩과 고구마를 심은 곳은 흙이 부드럽지만, 아무것도 심지 않고 방치된 곳은 땅이 딱딱합니다. 땅이 굳어지면 생명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분들이 봄이 오기 전에 논이며 밭을 갈아 흙으로 공기가 스며들게 하는 작업을 합니다. 객토작업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와 밭에서 김을 매곤 했는데, 김을 매는 것이 잡초만 뽑는 것이 아니라 흙을 부드럽게 하는 일입니다. 흙을 부드럽게 해줌으로 흙으로 공기가 들어가서 식물의 뿌리가 숨을 잘 쉬게 해줘야 열매가 잘 맺습니다. 굳은 땅은 척박하여서 식물이 자라도 제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부드러운 땅, 공기가 스며들 수 있는 땅은 비가 오면 비를 품고, 호흡하므로 흙이 썩지 않습니다. 흙이 굳어지고 호흡을 하지 못하면 썩는 냄새가 납니다.
옥토는 부드러운 땅이요, 땅을 부드럽게 하려면 자주 갈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말은 ‘간다’라는 말과 ‘가르친다’는 말의 어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이란 마음의 밭을 갈아엎어 마음에 신선한 공기가 드나들게 함으로써 생명을 품게 하는 일입니다.
1. 본질을 상실한 굳어버린 율법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스스로 구별된 자들이길 바라던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율법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굳어버린 율법이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율법, 하나님께서 직접 써 주신 10가지 계명으로는 부족해서 613개나 되는 조문을 만들었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어길까 두려워서 부수조항까지 만들어서 사람을 옥죄는 율법은 가히 죽은 문자요,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율법을 폐하러 오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없애버리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일, 그것은 율법조문을 벗어던진다고 될 일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정신을 살아갈 때 가능한 일입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뒤돌아보며 망설이지 말고 따르라 하시며 제자들을 향하여 ‘손에 쟁기를 잡은 자’로 표현합니다. 이사야서 2장 4절에서도 전쟁과 분쟁을 종식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되려면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10장 12절에도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하십니다. 묵을 땅을 갈아엎고 공의를 심으면 인내의 열매를 거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4장 3절에는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을 파종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저 묵은 땅을 갈아엎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굳어버려서, 숨을 쉴 수조차 없이 변해버린,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는 문자가 되어버린 율법을 갈아엎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에 대해 비유하시기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간 뒤에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깨끗하게 청소된 것을 보고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갈아엎는다는 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내는 것이 목적이지, 단순히 기존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율법조문을 던져버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의롭게 살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며, 그것이 율법의 완성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2. 죽은 문자,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의미
율법조문에 얽매이지 않고, 죽은 문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무렇게 살아가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엄격한 규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기준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기준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것이며, 타인의 평판과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늘의 뜻을 받들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율법조문은 벗어 던졌지만, 여전히 완전한 율법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주목하며, 타인의 평판과 기대에 부응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시 죽은 문자, 예수님께서 폐하시고자 하는 율법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남에게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율법을 지킴으로 예수님께 위선자들,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쓴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현상은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맞추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어로 ‘CANNON’이라고 하는데 ‘재는 막대’라는 뜻입니다. 즉, 참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항상 성경 말씀을 척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읽고, 공부하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읽는 행위는 우리의 삶을 하늘에 비추어보는 일입니다. 그렇게 비추어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가 바로 ‘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의 몸이 필요합니다. 그 몸이 필요하기에 이곳에 계신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3. 율법의 ‘일 점 일 획’의 의미
성경을 오로지 문자로 읽는 분들은 오늘 읽은 말씀 중에 18절에 있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하고, 쓰인 삶의 자리를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듯이 읽는 삶의 자리를 또한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인식의 부재는 심각한 신앙의 훼손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로워야 하며, 이 세상에서 주님의 몸으로 살아가려면 이 세상을 바라보며 선악 간의 분별을 분명하게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어는 문자뿐만 아니라 문자 아래와 위에 줄과 점이 많이 들어가는데, 점 하나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 하나를 잘못 찍거나 잘못 읽으면 전혀 다른 뜻이 되므로 ‘일점일획’이 아주 중요합니다. 율법의 언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므로 번역본으로 일점일획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어느 한 번역본만 진짜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단 중에서는 오로지 한 번역본만 사용하는 예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의미보다도 자신들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한 구절과 단어만 필요하므로 그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잘 모르는 이들은 솔깃하게 속아 넘어갑니다.
한국인들은 종교적인 심성이 여느 민족보다 깊다고 합니다. 이유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예로부터 한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한은 인간적인 노력에도 어쩔 수 없이 당한 부당한 일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수많은 외침과 지배자들의 수탈 속에서 저 너머에 있는 신을 의존하는 심성이 자라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급속하게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이런 심성과 맞물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온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부작용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데, 그 중 하나가 종교에 심취하면 매진하는 성향을 이용한 사이비 이단집단의 성경공부였습니다. 목요 성경공부다 뭐다 하면서 성경공부에 목말라하던 교인들을 현혹해서 내용을 더나 문자적으로는 목사들보다도 더 줄줄이 꿰는 교인들을 양산해 낸 것입니다. 그렇게 훈련받다 보니, 한 구절의 성경과 단어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의미를 탐구하는 일이 정상인데, 이 구절 저 구절 여기저기서 갖다 붙이면 성경지식이 많은 것처럼 포장되었습니다. 결국, 그들 때문에 성경은 다시 죽은 문자가 되었고,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죽이는 말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폐하고 온전하게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삶이 사이비 이단에 빠진 이들의 삶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그들보다 더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도 더 많이 읽고, 묵상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구원은 없다고 하십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