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이요, 빛이라
마태복음 5:13-16 / 2016년 4월 27일 수요성서연구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네 가지 생각이 동시에 스칩니다.
하나는, 왜 예수님은 “소금처럼 살아라, 빛처럼 살아라!” 하지 않으시고, 단언적으로 “소금이다, 빛이다!” 하신 것일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가는 것이었다면, 조금 흉내만 내고 살아도 좋겠는데 ‘소금이요, 빛’이니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해 마음이 아픕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살맛 나지 않는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일을 하는 이들이 바로 소금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오히려 살맛 나지 않게 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세 번째는,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어떤 어둠도 그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자극을 주어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게 하지 못한다면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1, ‘절반의 기독교인’과 ‘착각의 기독교인’
감리교를 설립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년 ~ 1791년)는 ‘절반의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리스도인의 외양을 갖췄지만,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와 닮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헌신하지 않는 적당한 신앙생활, 교회에서의 신앙생활만 전부인 줄 아는 신앙생활,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는 신앙생활, 이런 것들이 절반의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착각의 기독교인’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반기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는데 가장 불행한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임의 일차적인 원인은 목회자에게 있는데, 교인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교인들을 훈련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소홀히 하는 동안 이단 사설들이 그들의 영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회자가 두려워한다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사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의 신앙적인 성숙을 원하지 않는 목회자와 스스로 신앙적인 성숙을 이루고자 하지 않는 교인들의 합작품입니다. 교인들은 스스로 신앙적인 자립을 하지 않음으로써, 골치 아픈 생각을 안 해도 되고,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적당히 신앙 생활하면 나머지는 목사가 다 알아서 처리해 주므로 편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교인들이 성숙해서 목회자와 대등한 입장이 되면 자신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절반의 기독교인’과 ‘착각의 기독교인’이 넘쳐나다 보니 세상의 빛이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보다 어둡고, 서로 보듬고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봐야 할 교회가 서로 잘 안다는 이유 때문에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김기석 목사는 “소금은 늘 같은 소금이지 경우에 따라 짠맛을 내지 않는다. 빛은 언제나 빛이지 사람을 가려 비추지 않는다. 세상에는 소금처럼 보이지만 소금 아닌 이도 있고, 빛처럼 보이지만 빛이 아닌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말입니다. 여러분은 절반의 기독교인이나 착각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빛과 소금이시길 바랍니다.
2. 빛과 소금이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염전에서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려면 끊임없이 바닷물 속에 있는 수분을 증발시켜야 합니다. 아무 물이나 다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바닷물만이 소금이 될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가능성만으로 다 소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일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이지만, 소금과 빛이 되려면 ‘수분을 증발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부정입니다.
모세가 호렙산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신발을 벗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간 네가 옳다고 여기며 살아온 삶의 이력을 벗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부정’ 혹은 ‘비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시작은 ‘자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자만의 결과로 파생된 탐욕과 이기심과 교만 등을 비워버리고, 증발시켜 버려야만 비로소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이런 개인의 노력만으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도 소금과 빛이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아는 겸손과 맞닿아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개인적인 훈련은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 시몬에게서 ‘베드로’를 보셨으며, 나다나엘에게서 ‘참 이스라엘’을 보셨고, 창녀 마리아에게서 ‘성녀’를 보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속에서 소금과 빛을 보시고, 그 소금과 빛을 이끌어내시길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분과 만나면, 그분의 말씀을 만나면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3. 빛과 소금의 의미
소금은 자기가 없어지면서 뭔가를 이루어 냅니다. 빛이 비치면 잠자던 생명이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의 보람은 어두운 죽음의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며, 죽음의 세력에 짓눌려 살맛 나지 않는 세상에 살맛을 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언제나 우리의 육체를 매개로 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현대인들에게 육체는 영혼을 나르는 수레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삶, 여기에는 빛이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을 위한 삶, 타인의 아픔 때문에 애타는 심정을 가진 순간에 우리의 육체는 비로소 빛입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비노바 바베’는 “몸은 신의 들판을 경작하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어둠을 향해서 온몸으로 부딪혀 나가다 힘에 겨울 때,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빛으로 소금으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때,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됩니다.
교회가 가장 빛날 때, 신앙인의 삶이 가장 빛날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손발이 될 때입니다. 세상의 눈물을 닦으러 오셨던 예수님의 손발이 될 때, 교회도 신앙인도 빛나게 됩니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소금이 됩니다. 우리가 빛이기를 포기하고, 소금이기를 주저했기에 이 세상은 아직 어둡고, 불의가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세상에 대한 분노, 거룩한 분노를 회복해야 합니다.
지난 화요일 새벽예배 때 시편 26편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시편 26편 5절에 보면, 다윗이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하는 고백의 시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면 그와 짝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40절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조금 다르게 읽으면 “불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불의를 위하는 자니라”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고의 깊이를 깊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옳고 그름을 떠나 시류에 휩쓸려서 죄인 줄도 모르고 잔인한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의 경비원이었던 94세 전 나치 SS 대원 라인홀트 헤닝이 전범재판을 받기 위해 데트몰트 재판소에 출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그것이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 확신했으며, 경비원이었기에 그저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 아무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직적인 범죄의 일원으로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군대문화의 특징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귀신’이 등장합니다. 군대귀신의 특징은 떼로 몰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귀신을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떼에 들어가게 하신 후에 바다로 돌진하게 합니다. 그제야 귀신들린 자는 온전한 정신을 얻었습니다만, 사람들은 돼지떼가 아까워서 또 그런 일이 생길까 예수님에게 어서 떠나달라고 합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거라사 지방 사람들이 사람보다는 돼지떼를 더 소중하게 여김을 알게 됩니다. 물질 중심적인 사고방식인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도 보류시켰던 과거도 있었지만, 지금도 인간보다는 물질이 우선입니다. 그러니 살맛이 나지 않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런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십시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