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고난
마태복음 5:10-12 / 2016년 4월 20일 수요성서연구
오늘은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서 8번째 복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받을 복은 ‘천국’인데, 그것은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기꺼이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산상수훈 두 번째 시간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5장 3절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을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탐욕이나 욕심이나 자만 등을 비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받는 복’이 아니라 ‘사는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빈 마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채울 수 있고, 하나님을 채운 사람은 이미 천국,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 같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사는 이(마 13:44)와 같은 것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같아서 가장 좋은 진주를 발견하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진주를 사는 것(마 13:45-46)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의’는 무엇입니까?
구약성서의 인물 중에서 정의의 예언자로 불리는 아모스가 있습니다.
호세아(이스라엘), 이사야와 미가(유다) 등과 동시대 인물인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번영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여로보암 2세에 이르러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변강대국이었던 아시리아의 내부 균열로 잠시 여유를 가지면서 국가 발전을 본격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유다지역의 드고아 지역 출신의 아모스-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농부에 불과한 아모스(암 7:14)-가 나타나 국가적 번영의 허상을 지적합니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 장단을 맞춰 태평세월을 노래하는 종교적 타락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지적하는 타락의 현실은 참담(4-6장)합니다. 그들에게 “물이 없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8:11)”이라고 에언한 아모스는 “다만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5:23)고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사라지고 자본의 이익, 자본의 권리만 남아 있는 오늘날 이 시대, 경제적인 효율성만 내세우면 무엇이든지 정의가 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 여기에 덩달아 물질적인 풍요만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처럼 여기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 아모스의 예언이 과거의 예언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정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정의)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황금률은 수많은 종교와 도덕,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원칙의 하나로 ‘다른 사람이 해 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하라’는 윤리원칙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윤리관을 담고 있으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신구약 성서의 핵심은 누가복음 10장 27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율법학자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질문하자, 예수님은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반문합니다. 그러자 그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으니 그렇게 살아라!“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정의의 핵심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이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다섯 번째 시간에, “의에 주리고 목마를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에 민감하려면 귀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쟁사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살아갈 때에 비로소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내 안에 있는 폭력성과 불의함을 도려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정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과 의롭게 사는 것은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의 ‘의’는 상당히 편파적입니다.
언제나 사회적인 약자,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부르짖고 아우성치는 떠돌이 노예들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셨으며, 신약에서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셨습니다. 모두 사회적인 약자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바닥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아끼는 것’입니다.
3. 의로운 삶은 왜 박해를 당할까요?
11-12절 말씀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든 너희에게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나로 말미암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데, 왜 고난을 겪고 박해를 받아야 합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겪기까지 박해를 받으셨습니까?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이후, 끊임없이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유의 근원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자만심’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자만심은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지금껏 사로잡고 있습니다. 자만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의 진리는 강자의 논리입니다. 가진 자의 논리입니다. 그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경제, 법, 정치, 통치 질서, 심지어 종교까지도 지배자들의 편리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약자들의 편에 서서, 가난한 자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불편하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강자요, 기득권자이니 어떻게 하든 그 불편함을 제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유도, 콘스탄틴 황제의 신실한 신앙심이라기보다는 당시 로마제국을 통치하는데 기독교가 가장 유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로마 황제에게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기를 마다치 않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도 받았겠지만, 로마 제국을 위해서 그렇게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통치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18세기 기독교가 유럽 전역을 지배했지만, 약자와 가난한 자를 대변하던 기독교가 지배계층이 되고 강자들을 대변하는 종교가 되면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타락하자, 말씀의 본질을 붙잡고 씨름한 것이 아니라 문자를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신학적인 체계와 교리는 완성되었지만, 수많은 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마녀사냥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지만 죽음의 위협을 당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 부활을 보시고 기꺼이 그 박해를 받아들입니다. 어둠 너머에 있는 빛,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을 보았기에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향한 공격이나 박해는 때로는 직접적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부드럽게 유혹을 함으로써 그들을 박해합니다. 인간 안에 있는 자만심을 자극하고, 탐욕을 부추깁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실패할 것처럼 호도하고, 세상의 성공이야말로 모든 것인 양 꼬드깁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서는 ‘의’를 번역할 때에 ‘하나님께 헌신했을 때’로 번역했습니다. 적절한 번역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할 때, 우리를 박해하는 것은 총칼과 같은 직접적인 박해가 아닙니다. 차라리 그런 박해라면 분명한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하고, 신앙의 이름을 가장해서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용해 버리기 때문에 헌신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리에 서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단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들에 대해 비판하면, ‘비판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이며, 그래서 천국의 주인이라’는 해괴망측한 주장들 합니다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런 그릇된 사설에 빠져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건강한 신앙은 언제나 약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들의 편입니다.
강자의 논리를 양산해 내고, 그들을 닮는 것이 곧 축복이라고 가르친다면 거짓 종교입니다. 안타깝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올바른 신앙을 지키려면 박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러분과 이 교회는 의의 편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