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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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산상수훈(6) - 공감하는 용기

  • 관리자
  • 2016-04-13 0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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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용기
마태복음 5:7 / 2016년 4월 13일 수요성서연구

'긍휼'이라는 히브리어 ‘라헴’은 ‘여성의 태’,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여성의 태’는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양육하는 기관으로서 어머니의 무조건적이고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태중의 아기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헌신에 의해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어머니의 태에 있는 아가처럼 전적으로 사랑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긍휼의 사전적인 뜻은 ‘가엽게 여겨서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긍’은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 말고도 ‘괴로워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라헴’은 상대방의 아픔으로 인해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듯한 사랑과 공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 형제의 아픔에 공감해야 합니다.

 

구약 오바댜서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된 해인 B.C. 587년이 조금 지난 후에 쓰여졌습니다. 21절로 이뤄진 소책자인에, ‘주님의 종’이라는 뜻을 가진 오바댜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은 당신의 날을 선포하시고, 역사에 개입하셔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장 10-14절에는 에서의 후손 에돔이 죄악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에서는 이삭의 아들로 야곱과 형제지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판 뒤에 야곱과 갈등관계였으며, 다시 화해하기도 했지만, 결국 에돔 족속을 이뤘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돔과 이스라엘은 형제지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함락되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에돔 족속은 흐뭇해하며, 신이 나서 예루살렘을 약탈하는 일에 동참합니다. 그래서 12절 말씀에 “너는 네 아우의 날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주석성경).”고 합니다. 애돔 족속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마음 아파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흐뭇해하고, 약탈에 가담했다는 것은 형제간의 배신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히 멸절시킬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우리의 형제자매는 누구입니까?

 

혈육을 나눈 이들만 우리의 형제자매가 아닙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형제자매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형제자매입니다. 여기엔 사람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포함됩니다.

 

신앙의 품이 넓은 사람이란, 혈연과 지연을 넘어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사람뿐만 아니라 작은 풀꽃, 동물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더불어 살라고 주신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품이 넓은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10만 명씩(5초에 1명)기아로 죽어가는 이 현실에서 음식물쓰레기가 넘쳐나고,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일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서울의 지하철 역사마다 골판지를 깔고 밤을 지새우는 노숙자나 온종일 폐지를 주워 팔아야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도시빈민들의 삶, 평생 몸바쳐온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은 해고노동자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스펙 쌓는 것도 모자라 학비를 벌기 위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대학생들, 입시경쟁에 학원으로 내몰린 아이들, 인간의 취미와 여가를 위해 마구 파헤쳐지는 산야와 파괴되는 자연……. 그 모두 누구입니까? 그들이 바로 우리의 형제자매가 아니겠습니까?

 

3. 형제자매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한다는 말은 ‘긍휼하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히 여기는 복을 누리는 삶’에서 멀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불행이지요. 때론, 너무 마음은 아픈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주여!” 탄식기도를 할 수밖에 없어도, 형제자매의 아픔으로 인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을 때, 타인의 아픔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긍휼히 여겨지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기적의 자리에서는 언제나 그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때론 연민으로, 때론 분노로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매진하였습니다. 쓴잔을 원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기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 모두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죄인취급 당하던 이들의 아픔,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요, 그의 삶을 흉내 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그것은 바로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요, 그들을 긍휼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4. 공감하는 것은 곧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이 마셨던 쓴잔은 거절하고 오로지 포도주잔, 달콤한 잔만 바라는 이들이 많습니다. 온갖 아름다운 말들과 봉사와 헌신이 넘쳐나지만, 그 내면 깊이 들어가 보면 정치가들이 ‘오직 국민을 위해서’라는 헛공약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말들이 많다고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고, 정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구호만 난무하면 형식적인 신앙인이라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의 구체적인 증거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깊이 새길 수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면, 이웃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 그것을 이기주의라 하여 오랫동안 배척해왔습니다. 그 결과가 사실은 말로만 사랑이 넘쳐나는 오늘의 현실을 가져온 것입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형식적인 사랑만 오간 것입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존재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존재가치 역시도 자신의 존재가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이웃의 범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귀한 존재,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장님이요, 그들의 절규를 듣지 못한다면 그것이 귀머거리요,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아픔을 대변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벙어리인 것이지요.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는 기적, 벙어리의 혀가 풀리는 기적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기적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5. 공감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연속극이나 연극을 보면서도 우리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공감은 그런 류의 공감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런 공감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을지언정 이웃의 아픔을 해결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도움이 되려면 그들의 곁에 함께 있어주고, 그들에게 설 땅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산상수훈 네 번째 시간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는 말씀을 통해서 온유한 사람이란, ‘다른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이요, 그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설 땅이 없어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이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십시오. 그게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일이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오해도 받고, 때론 박해도 받습니다. 선한 사회라면 옳은 말을 하면 칭찬을 받지만, 악한 사회는 옳은 말을 하면 고발을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살아가려면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손해 볼 수 있는 용기, 그런데 이것은 손해가 아니라 결국은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며,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긍휼하게 살아감으로 나도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긍휼의 히브리어 ‘라헴’이 ‘어머니의 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 있는 아기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과 보호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헌신과 사랑과 보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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