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자
마태복음 5:6 / 2016년 4월 6일 수요성서연구
저는 야생화를 좋아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는 일이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척박한 바닷가 갯바위 틈에 자리를 잡고 피어났으면 옥토에 피어난 같은 종류의 꽃보다 오히려 색깔도 더 진하고, 향기도 더 깊습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 중에 민들레가 있는데,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아홉 가지 덕이 있다고 하여 ‘구덕초’라고도 합니다.
그중 첫 번째는, 씨가 바람에 날아가면 바위건 길바닥이건 우마차에 짓밟혀가면서도 피고 지며 억척스럽게 모진 환경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도심의 콘크리트 사이에서도 아주 작은 틈만 있으면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꽃 중 하나가 민들레입니다. 그래서 늘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가뭄이 심하던 어느 여름날, 전주의 한 골목길 돌담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다 뿌리까지 다 말라버린 민들레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가뭄이었기에 민들레가 다 말랐을까, 아무리 민들레라고 하더라도 견딜 수 없는 목마름에는 결국 타버리고 마는 것이구나. 마시던 생수를 부어주었지만, 아마도 그 민들레는 그렇게 말라 죽었을 것입니다.
1970년 암울하던 시대에 김지하 시인은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다.’ 표현했습니다. 이 ‘타는 목마름’, 어쩌면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런 상황에서 ‘타는 목마름’을 누구나 느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타는 목마름’을 느끼며 행동하던 사람들을 불온한 사람이라 여겨서 가두었던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권력의 거짓선전을 옳다고 여긴 이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이들을 ‘빨갱이, 국가전복세력’이라고 했습니다. 분단국가의 불행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념논쟁을 통해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일단 ‘적’으로 분류가 되면, 어떤 폭력도 정당화되는 것이 불행이지요. 이 문제는 사실,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1. ‘주림’과 ‘목마름’은 결핍의 상태입니다.
결핍은 불편함과 불쾌함을 동반합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데 없는 것이 결핍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인가?’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의’입니다. ‘옳은 일’에 대한 결핍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옳은 일이 아니라, 자기의 소유욕을 위해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산다면 탐욕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주림과 목마름’의 결핍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한 결핍을 느끼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산상수훈 다섯 번째 시간의 제목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자’입니다. 이 제목의 의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귀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은 아주 작고 은밀하고 비밀스럽고 신비해서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쟁사회에서 늘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오로지 소유하는 일을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들, 겉모습을 꾸미는 데만 여념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의’ 같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의는 곧 ‘힘’이요, 그 힘의 원천은 ‘돈’이요, ‘권력’입니다. 그러니 의에 대한 주림이나 목마름 같은 것들을 느끼지 못합니다. 일상의 폭력이 만연해도 그것이 폭력인줄로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일상의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힘껏 그 폭력에 순종하고 양산하면서 그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살아가십니까?
그것이 ‘의’에 대한 결핍, 주림과 목마름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배부름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내 안에 있는 폭력성과 불의함을 도려내야 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배고픈 것을 모른다고 합니다.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자기 몸에 대한 폭력에 둔감한 것입니다. 그러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이 세상에 만연한 폭력에 민감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현대인들이 폭력에 둔감하다는 점입니다. 그저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라고 자조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민감해야 합니다. 먼저, 내 안에 있는 폭력성의 뿌리를 잘라내고 도려내기 위해서 타는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절규하듯, 고픈 배를 채우고 싶어 갈구하듯 내 안에 있는 폭력성과 불의한 일들을 도려내고자 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도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신앙적인 결단 때문에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때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의로운 행동’을 할 때 정치적인 행동을 한다고 오해를 받는 것은 어느 누구도 정치경제문화적인 것과 동떨어져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 정치를 하고자 하면 문제겠지만, 교회의 일을 하는데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와 부닥치게 되면 어떻게든 풀어야겠지요. 그건 정치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내 안에 있는 폭력성과 불의함을 도려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대사회적으로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변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폭력성과 불의함이 더 큰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자기 의(義)’ 혹은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인 것 같지만, 대부분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분을 보면 이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분들입니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일을 할 때에도, 세상일을 할 때에도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3. 착하게 살기는 쉽지만, 의롭게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과 의롭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종종 혼동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의롭게 사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 비난을 받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착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불온한 자’로 여겼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착한 사람이지만, 그가 곧 ‘옳은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제대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제대로 관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관계하고 있지 못한 것이 죄요, 불의한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와 교인에게 착하게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는 의로워야 합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아가려면, 의에 대한 결핍, 주림, 목마름이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몇 해 전 여름 전주의 돌담에서 말라죽어 간 민들레를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민들레를 보면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절망하는 이들에게 너무 쉽게 “잘 될 거야!” 위로하지 말자.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한 잔의 물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나눔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깊게 깨달았습니다. 목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잘 살아야 해!’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마 착한 말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의로운 행동은 ‘그에게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물을 준 후에 ‘잘 살아야 해!’라는 말이 비로소 의미 있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이라는 것은 행동하는 신앙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받을 복은 ‘배부를 것’입니다. ‘배부를 것임이요’의 다른 번역은 ‘흡족할 것이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에 대해 목마란 본 이들은 압니다. 의로운 행동을 하다 설령, 고난을 받아도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그러니 흡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배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복을 누리고 사시길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