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슬퍼하는가?
마태복음 5:4 / 2016년 3월 23일 수요성서연구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슬퍼하라는 말씀은 분명히 아닐 터이니, 우리는 ‘애통’과 ‘슬픔’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슬픔’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슬픔의 순간은 아픔의 순간입니다. 뜻하지 않은 이별과 이루지 못한 꿈, 시련…….그런데 신비스럽지 않습니까? 그런 슬픔에 굴복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 모든 아픔이 있었기에 우리의 삶도 더욱 다채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깊어졌습니다.
1. 견딜만한 아픔을 주시는 이
나무에는 옹이가 있습니다.
옹이는 나뭇가지가 부러졌거나 병충해 같은 것들이 나무를 침범했을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팠을 때 그 아픔을 이기기 위해 생긴 것이 옹이입니다. 아시다시피 나무의 가장 단단한 부분은 옹이입니다. 그런데 나무의 향이 가장 깊은 곳도 옹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돌아보면, 우리의 삶에서 만난 슬픔, 아픔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일그러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성하고 깊게 한 것은 아닌지요?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아팠지만, 이 세상이 끝난 것 같았지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인생의 맛’을 아는 것처럼 그 슬픔과 애통함이 있었기에 우리의 삶은 더 단단해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견딜만한 아픔’ 외에는 주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을 산상수훈의 말씀과 연결해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슬픔은 우리를 아프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견딜만한 아픔 외에는 주지 않으시고, 그것조차도 복 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문제들을 이 말씀에 의지하여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아픔이 디딤돌이 되어 복이 되길 바랍니다.
2. 나의 슬픔을 통해서 너의 슬픔을 보라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나의 아픔을 통해서 이웃의 아픔을 느끼고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눈물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부분을 아주 적절하게 해석했는데 ‘애통하는 자’를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이라고 했습니다. ‘잃었다’가 아니라 그렇게 느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 것처럼 느끼는’, 이것은 바로 ‘내가 경험하는 애통이나 슬픔은 물론이려니와 이웃의 애통과 슬픔을 마치 내 슬픔처럼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리켜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란,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자본을 가진 이들이 권력을 움직이고, 자본을 가진 이들이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이건 좀 학문적으로 근사하게 내린 정의고, 좀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승인된 사회제도’입니다. 자본의 다른 말은 ‘돈’입니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 돈을 신으로 아는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식까지도 죽입니다. 자기 자식까지도 죽이는 시대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것은 사치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래야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악해도 우리는 ‘너의 슬픔’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들의 아우성에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며 부르짖는 자의 아우성을 “하나님의 나라 이뤄주소서!”라는 탄원의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 사건은 바로 합비루의 애통하는 아우성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어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의 아픔을 교회에서 정치 얘기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치 얘기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만,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날 그 어떤 영역에서도 사실 정치경제적인 영역과 상관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 사회의 정치경제적인 것과 상관없을 수 없듯이 우리는 신앙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치적인 것과 연결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기독교가 약한 자, 가난한 자, 눌린 자들의 종교인 이상 어쩌면 기득권자들의 정치적인 입장과는 다른 입장일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애통하고 있습니까?
일하고 싶어도 취업할 수 없는 대학졸업생들이 애통하고 있으며, 비정규직으로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노동자들이 애통하고 있으며, 장애로 인해 차별받는 장애인들이 애통하고 있으며, 쪽방촌 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이 애통하고 있으며, 학벌로 줄 세우는 경쟁사회에서 오로지 시험 보는 기계가 되어버린 학생들이 애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기아와 전쟁과 독재권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있습니까?
남의 슬픔과 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줄 모르는 예루살렘의 참상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 1장 12절에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한탄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이유가 이런 이유였습니다. 애통하는 자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니 예루살렘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평화가 없기에 예루살렘을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애통하는 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느끼는 이들이 있는 세상이 평화로운 세상인 것입니다.
애통하는 이들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낄 줄 아는 이들이 행복한 사람이요, 그들이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주님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불의한 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을 위해 함께 슬퍼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신앙인이 해야 합니다.
3. 무엇을 슬퍼하는가?
세상이 각박해 지면서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그러니 “나 살기도 바쁜데 남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냐?”고 합니다. 이웃의 슬픔과 애통함을 함께 느끼고 나누라고 하면, 머리로는 “아멘!”하면서 삶으로는 “노멘!”입니다. 함께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사탄의 꾐에 빠져서 애통하는 자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여러분, 먼저 자신을 위해 슬퍼하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선하게 살고자 해도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탄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으로 슬퍼하십시오. 이 자각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고통 받는 이웃을 헤아리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십시오. ‘내가 그들이라면 심정이 어땠을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슬퍼하십시오.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애통하는 자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바로 애통하는 당사자가 되어 슬퍼하십니다.
왜 애통하는 자가 행복합니까? 왜, 남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느끼는 이가 행복합니까?
이런 행위야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동참하는 것이요,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를 품으시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시며, “수고했다, 애썼다”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