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채우라
마태복음 5:3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가복음 6장 20절에 나오는 ‘가난한 자’에 ‘심령’이 추가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성경은 야고보서인데 우리가 오늘날 읽는 성경은 내용과 중요성에 의해서 순서가 편집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는 마가, 누가, 마태, 요한복음의 순서로 쓰였으며, 제일 먼저 쓰인 마가복음과 공통되는 말씀들이 다른 공관복음서에도 있는 이유는 마가복음을 참고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곧 메시아였음을 확증하며, 그를 구약시대부터 기다려오던 메시아로 기술합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이들이 많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태복음은 마가나 누가에 없는 단어들에 당시 사회에서 풍미하던 이원론적인 개념들을 포함시키는데 ‘심령, 하늘 나라’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그냥 ‘가난한 자’였는데 ‘심령’이 포함되었고, ‘하나님 나라’는 ‘하늘나라’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천국’, 그래서 마치 하나님 나라가 저 하늘에 있는 것처럼 혹은 사후세계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하고, 현재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간디는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온다.”라고 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 안에 ’행복의 샘‘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샘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샘이 솟아나면 그곳으로 물이 흘러듭니다. 샘이 솟아서 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인지, 물이 흘러어와 샘이 솟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샘이 솟아 오르지 않고 멈추면 물도 더는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샘이 솟아오르면, 그 샘에서 물이 차고 넘쳐서 마침내 바다가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내 안에 행복의 샘’을 품고 사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으로 가해지는 충격 때문에 언제나 갈등합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은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 때문에 우울합니다. 사회적으로, 외적으로 가해지는 충격들과 개인적인 갈등들 그래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싶은데, 로마서 7장 22-23절의 탄식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죽음에서 건져내랴!” 는 바울의 탄식이 우리의 탄식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은데, 영성 생활을 잘하고 싶은데 안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을,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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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킨스는 <놓아버림>이라는 책에서 근심, 걱정, 우울함 등의 모든 감정을 놓아버리고 항복하면 그들에게 더 먹이를 주지 않음으로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놓아버리고, 힘 빼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놓아버림과 힘을 빼는 것은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놓아버림과, 힘을 빼는 것, 이것의 신앙적인 용어가 “가난해지는 것‘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상징하는 바는 ’비움‘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벼랑 끝에 서 있는’이라고 번역했는데, 작아질 수로고 하나님 나라(천국)는 확장된다.‘고 했습니다. ’벼랑 끝!‘, 저는 여기서 개인적으로 공생에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신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성전꼭대기에서 혹은 높은 산 위에서 뛰어내리거나 절하라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광야 40일의 밤낮 금식으로 이미 예수는 ’육과 영‘ 모두 가난할 때로 가난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거기에 빵과 기적을 채우라 하고, 세상의 것을 섬기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어떻게? 이미, 가난할 대로 가난해진 예수님의 빈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천국이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 지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받는 복’에 관심을 두지 말고 ‘사는 복’에 관심을 두십시오.
산상수훈의 말씀은 사실 ‘사는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살아야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사는 복’에는 관심이 없고, ‘받는 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면, 복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삶은 우선순위를 잘 따져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동양의 언어로 바꾸면 ‘비움, 텅 빈 충만’이라 하겠습니다. 라틴어 ‘rasa'라는 말은 ’여백의 미‘를 가리키는 말인데 서구의 화법은 ’채움‘이지만 동양의 화법은 ’여백의 미 -비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rasa'는 채움과 비움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들을 놓아버리고, 내려놓고, 항복하고 살아보면 행복한데 이런 순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이 동물적인 감각을 몸에 익히려면 수백 수천 번만으로 부족해서 수만 번씩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몸이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반응합니다. 자연스럽게 몸에 익는 것이지요.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이미 어떤 것은 훈련으로 몸에 밴 것도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것은 교정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 잘못된 것을 교정하는 것이 사실은 더 힘듭니다. 받는 복보다 사는 복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우리의 신앙도 부드러워지고 자유스러워집니다.
2.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훈련을 합시다.
우리의 마음 창고를 살펴봅시다.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제 마음의 창고를 들여다보면 거의 무기고 수준입니다. 교만의 칼, 적의의 칼, 탐욕의 창, 열등감의 방패……. 이런 것들로부터 가난해져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부드럽게 하는 일은 단번에 되지 않습니다. 한꺼번에 없앨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합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일, 잡초 뽑는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몽돌처럼 만드는 일도 그렇지요. 다 되었다 싶을 때, 다시 날카로움이 속살에서 돋습니다. 그러므로 훈련을 해야 합니다.
3. 가난한 마음에 하나님을 채우십시오.
오늘 제목이 ‘하나님을 채우라’입니다. 비우기만 하고 채우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누가복음 11장 24-26절에 보면 ‘주인 없는 빈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두었더니,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형편이 더 안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일을 하고, 땅에 속한 자는 땅의 일을 합니다. 하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을 깊게 깨우쳐 우리의 삶이 되게 하고자 우리는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성경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깊이 깨우친 말씀, 비우고 익힌 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신비를 경험하면서 신앙의 맛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솟아나는 샘솟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너희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이 행복의 샘이 여러분 안에서 솟아오르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