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
마태복음 5:1-2
지난주에는 봄날이 매우 좋아서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은 따스한 봄날에 대한 결례인듯하여 가까운 산을 찾았습니다. 두 주 전까지만 해도 눈과 얼음이 가득했었는데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스럽고, 쌓였던 눈은 흔적도 없습니다. 경기 중부의 산임에도 ‘너도바람꽃’이라는 꽃과 눈 맞춤도 했습니다. 그 따스한 봄날을 산에서 보내면서 ‘예수님이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도 이런 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수요 성서연구 첫 번째 주제로 무엇을 정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구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으로 시작할까, 오늘날 신학사상과 교리를 형성하고 있는 ‘바울서신’으로 시작할까, ‘예수님의 기적이야기’로 시작할까, ‘성서의 인물’로 시작할까 등등의 고민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정수(精髓)가 담긴 ‘산상수훈’을 수요 성서연구의 첫 번째 주제로 잡았습니다. 거칠게 커리큘럼을 잡아보니 7장 29절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으로 대략 30여 주의 여정입니다.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높은 곳에 있는 한남교회가 바로 ‘산상’이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에 적합한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함께 산상수훈을 깊이 있게, 천천히 바라보면서 그 안에 담긴 보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생명의 말씀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1. 무리와 제자
개역개정판과 한글판과 표준새번역 모두 5장 1절의 ‘무리’와 ‘제자’를 동일하게 번역했습니다. 성경이라는 번역본에서는 무리를 군중이라고 번역한 것이 다르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서는 제자를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무리’라는 뜻은 국어사전에 ‘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떼’를 말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의 의미니, 군중이라는 뜻이 맞습니다.
김기석 목사는 ‘무리(無理 또는 無里)’로도 해석해 보았다고 했습니다. ‘없을 무(無)’에 ‘다스릴 리(理-까닭, 이치)’로 보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알맞은 정도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마을 리(里)’로 본다면, ‘거처할 마을이 없어 이리저리 떠도는 이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 중에서도 이런 이들이 많았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또다시 바라면서 따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을이 없이 정처 없이 떠도는 무리’라는 뜻도 틀리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치에 맞지 않거나 알맞은 정도에서 벗어난 이라는 뜻’의 무리가 와 닿았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제자’라는 말과 대비가 됩니다. 그를 위해 인생을 건 사람들, 제자들이란, 이치를 따르는 사람들이요, 알맞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와 구별될 수 있겠습니다.
군중, 무리는 그냥 범부필부, 불특정 다수입니다.
군중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리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에도 이치에 맞게 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나 줏대 없이 그저 휩쓸려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특수정예이고, 특별하게 선택받은 이들이므로 판단을 할 때에 이치에 맞게 하고, 자기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군중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약간의 언어 유희적인 측면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무리인가, 제자인가?”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제자이길 바랍니까, 무리 중 하나이길 바랍니까? 여러분은 무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제자이길 바랍니다.
2. 동역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히브리인들이 고통 속에서 아우성치고 부르짖을 때에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역사에 개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광야 호렙 떨기나무에 불꽃으로 현현하신 하나님, 그분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동역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에 인간의 참여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고 계시는데, 홀로 일하시지 않고 동역자를 부르신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의 참여를 촉구하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응답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고, 진행형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귀한 뜻이 있으셔서 여러분을 동역자로 부르셨기 때문이요, 그 부르심에 여러분이 응답하셨기에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또 있지요. 부름 받은 이들에게는 소명이 주어지는 데, 그 소명의 성취는 부름 받은 이들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 보내신 분의 능력으로 성취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9절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의 능력 안에 갇혀 있으니까 ‘부활’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때론 무모해 보여서, 사람들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웃음거리가 된다고 해도, 그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 제자요, 동역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현실이 어떻게 바뀌길 바라실까요? 그런 아픈 현실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제자가 되어 살고자 하면 사실 우리 현실에서는 아주 힘듭니다. 오해도 많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입니다.
이후에도 살펴보겠지만, 산상수훈에 속한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귀하고 기쁜 일이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부르셔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좁은 길이라도 그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3. 'CREDO' 나는 믿습니다.
산상수훈은 ‘삶의 강령’입니다. 단체마다 ‘강령(綱領)’이 있습니다. 강령은 국어사전에서 ‘일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조’를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도신조는 ‘CREDO'입니다. 그런데 라틴어 ’CREDO‘에는 ’심장을 바친다.‘는 뜻이 있습니다. 심장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강령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나는 믿습니다.”라는 고백 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는다 합니다. 너무 쉽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너무 쉽게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길, 신앙고백, 제자의 길이 너무 무겁고 힘겨운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은 기쁨의 길이요, 행복한 길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쉽고 가벼운 짐, 그래서 쉼(안식)을 얻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무거운 짐과 멍에를 다 벗어버리고 자유로워지는 일, 그리하여 요한복음 8장 32절에 있는 말씀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살아가는 일, 그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