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라는 책을 읽고 있다.
시인은 시에 미혹되어 30년을 살았지만, 시를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나 역시도 목사로 살아온 지 30년이 되어가지만, 설교를 모르겠고, 더군다나 하나님도 모르겠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은 신비한 현모, 기묘자, 절대 타자로 존재하신다.
시인은 우리나라에 수천 명의 시인이 있는데 왜 우리가 사는 현실은 시적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반문 앞에 수천 명도 더 되는 목사와 교회와 신도가 있는데 왜 우리의 현실은 성경적이 아니냐고 반문해 본다. 시인들 시를 빌미로 자기 욕심이나 채우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설교자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활개를 치니 이런 현실을 맞이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인은 영혼의 생산자'라며,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으라고 권면한다.
많이 쓰기 전에, 많이 생각하기 전에 제발 많이 읽으라고 한다.
무엇을 많이 읽을 것인가? 시인에게는 악기에 해당하는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한다.
그래야, 영혼을 춤추게 하는 악보를 그려내고 연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설교자에게 악기는 성경이다.
그 악기는 그냥 아무나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보를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악보를 읽을 뿐 아니라,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소리가 소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충분히 해석되지 않은, 연습되지 않은, 허무맹랑하여 소음이 되어버린 설교가 판을 친다. 음악에 대한 전이해가 없는 청중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수준의 연주만을 원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설교자는 장님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길로 안내하면서 자기들만이 '그 길'을 걸어간다고 주장한다.오도된 믿음과 확신을 그래서 무섭다. 이런 이들에게는 회개할 기회조차도 없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배워가며 발전한다.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순간, 시인은 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설교자도 설교 한 편이 완성되는 순간, 설교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해진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청중들에게만 살아가라하면 사이비설교자요, 거짓교사다.
타고난 설교자는 없다.
수많은 독서와 묵상을 문장으로 풀고 말하는 과정을 지속하며 한 편의 설교를 완성하고 선포하며, 그 순간부터, 그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한 것이 설교자인 것이다.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요,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불러주는 말씀을 받아쓰는 사람이다. 시가 실용과 경제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설교도 이 세상의 실용과 논리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설교의 숙명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설교 한 편이 나온다고 할 때, 설교자는 설교와 연애해야한다. 청춘의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 종일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듯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번잡하다. 설교 한 편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미주알고주알 안 끼는데 없이 번잡하니,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있기나 하겠는가? 들을 귀가 없으니 헛소리나 하면서 무슨 대단한 설교를 하는 줄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도 목사도 신앙인도 차고 넘치지만, 우리의 현실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오직 말씀으로만, 성서로만!”을 외칠수록 말씀이 없는 기이한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