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 분야에서 몇 순위냐가 아니라, 비굴하지 않게, 때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제 길을 가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어떤 성과를 얻지 못했어도, 그것이 성과없이 끝날지라도 나는 그 삶이 옳다고 본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일에는 제일인자가 되기 위해 힘쓰고,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정한 일인자다. 이런 사람에게 기회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함을 지속할 것이며, 기회가 온다면 늘 하던대로 겸손하게 살아갈 것이다. 단지,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는 이전에 이런저런 제약으로 힘들었던 상황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삶이란 철저하게 개인적이지만, 그 어떤 개인도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더불어 살아감’을 추구해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한다. 더불어 삶에 대해 무지하면, 그것조차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 조차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큰 기쁨이지만, 배움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기꺼이 감내해야만 하는 아픔이 있다. ‘쥬이상스(juissance)’, 그렇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斷腸의 아픔을 감내하지만, ‘쥬이상스’이며 '스프랑크니조마이'다. 신은 인간에게 공감(compassion)의 능력을 심어 주었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 그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창자를 끊는 것과도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단장의 아픔'을 감내하는 것이 ‘공감’이다. 이것은 단지 ‘고통’을 억지로 나누는 차원이 아니다. 열정적(passion)으로 나누는 것이다.
‘코로나19’가 ‘펜데믹(pandemic-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으로 확산되어 전 세계가 불안과 공포로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희망을 노래하며 자기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 의사가 될 수도 없고, 모두 의사일 필요도 없다. 이웃을 배려하며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상을 최선을 다해 지켜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이 어찌되든 말든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 최악이다.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가 있다. 유명가수들이 함께 모여 ‘FOR’라는 부제를 걸고 노래를 부른다. ‘for Africa, Haiti’ 등이 그것이다. 아는 가수도 있고, 처음 보는 가수도 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자기 분야에 대한 자부심’을 본다. 그래, 가수는 노래를 부르면 된다. 패션 디자이너는 옷을 만들면 된다. 작가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면 된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일상을 이어가면 된다. 단, ‘공감능력’을 잃지 말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 빛이 아주 작은 빛이라고 할지라도 어둠을 비추고, 어둠을 몰아내는 일상이 될 것이다.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시고 대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필이면, 왜 가이샤라 빌립보였을까? 그곳은 로마 황제 디베룟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이샤라’라고 불렸던 지역이었다. 그곳은 로마인들의 신 판(Pan, “모든 것”)이 지배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은 현세를 주관하고 있는 우상의 도시 한 복판에서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게 하시기 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펜데믹(pandemic)’의 상황에서 제국주의 로마의 ‘Pan’을 떠올린 이유는 이렇다.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 가장 먼저 우리가 배운 것은 ‘일상의 소중함’이다. ‘사회적거리두기’를 통해서 개인에게 주어진 일상의 시간은 더 많아졌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코로나19 이후의 삶을 결정할 것이다.
처음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상의 흐트러짐’을 무기력하게 맞이했다.
그저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더 많은 시간들이 주어졌지만,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공허함과 불안과 공포 등으로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경험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상황이 단기적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장기화된다면, 우리의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따를 것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그 변화할 일상을 깊이 생각하는 이들만이 자신의 삶을 지킬뿐 아니라 이웃의 삶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