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든지, 심지어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방언이 되지 않게 하려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4-새번역)
위의 말씀을 정리하면, 사랑의 다른 말은 ‘오래 참음, 친절, 시기하지 않음, 뽐내지 않음, 겸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다 보니 ‘입술로만 살아지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려면, 좀 더 친숙한 일상의 단어로 바뀌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인내, 친절, 겸손’ 등등의 단어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인내와 친절과 겸손 등의 덕목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하면서, 구체적인 단어들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들을 정리하는 중에 중심단어가 무엇인지, 저자들이 생각하는 공통점들이 무엇인지 돌아보았다.
헨리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에서는 “당신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게 행동하십시오.”라고 권한다. 최선을 다하고, 올곧게 살았으므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던 나의 교만한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문장이었다.
배철현은 <정적>에서 “머리로 배운 것을 가슴으로 내리는 데 40년이 걸린다. 기억으로 존재하는 지식은 내 말과 행동을 통해 배려와 친절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자신의 지식이 배려와 친절로 나타나지 않고 정체된다면, 하나의 이념이 되어 자신을 옥죄고 타인을 정죄하고 배척하는 무기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어쩌면, 신학적인 지식과 성경지식으로 교인들에 군림하는 목사는 아니었을까 반성하게 하는 문장이었다.
야고보서 3장 17절은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새번역)”라고 강조한다. ‘위에서 오는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평화스럽고, 친절하게’전했는지 돌아본다.
최재붕은 <포노 사피엔스>에서는 디지털 문명의 본질이 요구하는 인재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배려할 줄 알고, 세심하고, 무례하지 않으며, 친절하고, 합리적이고, 배려할 줄 알고, 과학적이며 또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몇몇 단어들을 수정하고 첨부하면 마치 고린도전서의 말씀과 야고보서의 말씀을 아우른 것 같은 문장이다. 그 외에도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에는 데이 셔퍼트의 말을 하기 전에 거쳐야 할 <세 황금문, Three Golden Gates)>을 소개한다.
1. 그것이 참말인가?
2.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3.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 각기 다른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있게 주장하는 바는 ‘친절’이다. 내가 주목하는 바도 데이 셔퍼트가 말하는 바, 세 번째 관문인 ‘친절’이다. 참말이고 필요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친절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리라. 서로 친절히 대하는 것(엡 4:32)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도 관계가 있으며, 그의 명령이기도 하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참말이나 필요한 말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친절’이 있어야 한다. ‘친절’이라는 단어는 구정연휴에 독서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얻은 수확이며, 내 삶에 자잘한 문제들이 왜 발생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정금 같은 단어였다.
경자년 새해 덕담을 한마디 전한다.
“어디에 있든지 최선을 다하고, 조금만 더 친절하십시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