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신앙은 공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종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 살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아름다움’의 어원을 ‘앎’이라고 했습니다. ‘앎’이란 ‘껴안는 것’을 의미하고, ‘껴안는다는 것은’ 곧 ‘공감’한다는 것이요, 공감은 곧 사랑이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껴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도 결국은 ‘앎’과 연결이 됩니다. 단순히 어떤 이론을 아는 것은 진정한 앎에 이른 것이 아니고, 삶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응답하는 실천에 이른 신앙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기는 하는데 삶을 살지 못하면, 더군다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위선적인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선적인 신앙은 실천이 없기에 절름발이 신앙인데, 자신의 신앙이 절름발이 신앙인 것도 모르고 ‘다 되었다!’ 생각하면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함께 힘들어집니다. 예수님은 위선적인 신앙인들을 경계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하시기도 했습니다. 삶이 빠져버린 신앙은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기 때문입니다.
공감(共感(공감))에서의 ‘感(감) pathy’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인 상태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내재화함으로 타인을 껴안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려면, 공감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