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존재인가, 존재물인가?
신학적으로 존재는 오직 한 분이신 그분이고 유한성을 가진 인간은 존재물(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존재물 안으로 존재가 들어옴으로 ‘존재물’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것의 다른 표현이 영생의 삶이요, 그 삶은 존재물의 유한성을 넘어선 삶이기에 존재의 삶이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에서 소유의 삶이란 ‘존재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다.
왜냐하면, 소유의 삶은 끊임없이 존재물을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몬’이며, 우상숭배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가 숭배하는 ‘돈’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세상’ -무엇이든 다 할 수는 있는 것인가?- 이라는 착시를 일으키는 세상에서 존재가 되기를 포기한 인간은 존재물의 노예가 되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존재물을 '다스리는 권리'를 포기했다.
이렇게 존재이길 포기한 이의 불행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진정 사랑해야할 이들까지 존재물의 노예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자신과 그의 삶을 존재물로 타락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마몬 존재물의 노예가 되었을 때 ‘성공’했다고 자축한다.
그러나 그것은 트리나 파울루스의<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정점에 선 애벌레들과 같지 않은가?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쉿!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누설되면 안 되니까, 조용조용...”
그렇다.
이런 깨달음조차도 없는 듯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비가 되는 애벌레가 있는 법이다.
나는, 스스로 나비가 되길 원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나비가 되길 소망한다.
그렇다면, 질문하라.
“나는 무엇을 추앙하는가?”
2022년 7월 3일 주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