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예수는 修辭學的인 質問을 던짐으로써, 質問을 받은 이들로 하여금 삶에 대한 省察과 根本的인 變化를 要求한다.
信仰 혹은 神에 關한 質問은 分明한 解答이 있는 것이 아니다. 旣存의 價値觀을 끊임없이 破壞하고, 現在의 告白을 疑心함으로써, 絶對他者를 向해 나아가는 것이다.
新約聖書에서 예수의 첫 質問은 마태복음 6장 25절에 等狀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이 質問은 衣食住의 問題에 無關心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優先順位에 놓아야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衣食住는 手段이다.
手段이 目的化하면 맘몬이 된다.
예수는 삶에 있어서 衣食住보다 더 重要한 任務는 神의 나라를 이루려 努力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任務를 完遂하려면, 먼저 자기 안에 創世前에 計畫을 가지고 創造하신 하나님의 DNA를 發見해야 한다.
自己 안에 있는 ‘하나님의 形象(하나님의 DNA)’을 發見하고, 實現하는 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廣野 40일간의 默想(禁食祈禱)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自己 안에 있는 하나님의 DNA를 發見한 것과 같은 過程이 필요하다. 絶對他者를 만나게 되면 그의 뜻을 알게 되지만, 어설프게 만났다고 錯覺하게 되면 그의 뜻과는 相觀없는 自身의 뜻을 絶對他者의 뜻으로 奇巒하여, 他者뿐 아니라 自身도 奇巒하게 된다. 似而非가 되는 것이다.
맘몬의 時代를 살아가고 있다.
人間의 모든 關心事는 衣食住이며, 信仰이나 意味 있는 삶 등은 徹底하게 排除 당한다.
이런 까닭에 自身의 삶에 對한 根本的인 質問조차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니 視線이 늘 여기, 맘몬에만 머물고 있다.
그 너머에 있는 神의 나라,
그 너머에 있는 人間다운 삶은 그들의 關心事였던 적이 없다. 그것이 맘몬의 計略이기도 하다.
廣野 40일 禁食祈禱를 마친 예수를 誘惑했던 誘惑者의 試驗을 넘어서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런 默想과 苦行의 時間도 없었음에도 왜 사탄이 자신에게는 그런 誘惑을 하지 않느냐고 不評한다.
어떤 誘惑에 넘어갈까 헛된 꿈을 꾸면서 말이다.
白合 한 송이가 꽃을 피우려면, 온 宇宙가 協力해야 한다.
땅은 習氣를 머금고 있어야 할 것이며, 空氣는 따스해야할 것이고,
바람과 햇살과 모든 條件들이 맞아야 씨앗은 비로소 싹을 틔울 것이다.
그리고 싹을 틔운 후, 3年이 지나야 비로소 첫 번째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온 宇宙가 作用해서 피워낸 꽃은 人爲的으로 만들어진 솔로몬의 옷과는 비교할 수 없는 價値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들에 핀 白合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작은 들꽃 한 송이에, 쌀 한 톨에 온 宇宙가 들어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아주 작은 것들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것이다.
衣食住는 우리 人間 삶에서 반드시 必要한 것이지만, 그것은 덤으로 채워지는 것이요,
그런 나라가 곧 神의 나라인 것이다.
神이 自己 안에 심어준 偉大한 하나님의 形像을 키워내는 사람들이 衣食住걱정에서 埋沒되지 않게 하는 世上,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뤄질 것이다.
삶의 優先順位를 衣食住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두는 사람, 그 사람은 福이 있다. 그들이 맘몬으로부터 自由함을 얻을 것이다.
(배철현 – ‘위대한 인간의 질문’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