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다.
“기도란 순수한 주목(attention)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다소 낯설었다.
우리는 기도를 말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무언가를 간구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여긴다. |
그러나 베유는 기도의 본질을 말하기보다 바라보는 데서 찾았다.
생각해 보면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깊이 바라보는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섣부른 충고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사랑의 시작은 주목이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주목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눈을 뜨면 수많은 정보가 밀려든다.
뉴스와 영상, 광고와 문자, 댓글과 알림이 쉼 없이 우리의 감각을 두드린다.
우리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정작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수많은 소리를 듣지만 정작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너무 많은 정보가 쌓여 있지만 지혜는 자라지 않는다.
너무 많은 지식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지만 삶은 깊어지지 않는다.
많이 알지만 깊이 아는 것은 없다.
많이 보지만 제대로 보고 들은 것이 없다.
관조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관조란 단순히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존재 앞에 머무르는 능력이다.
꽃 한 송이를 보며 걸음을 멈추는 일,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 성경 한 구절을 오래 붙들고 묵상하는 일이 모두 관조다.
예수께서도 자주 멈추셨다.
길가의 들꽃을 바라보셨고,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셨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던 맹인을 보셨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삭개오를 올려다보셨다.
예수의 삶은 주목하는 삶이었다.
하나님 나라 역시 주목에서 시작된다.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보이지 않던 고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찮게 여기던 생명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세상의 속도에 밀려 잊고 살았던 하나님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영성은 더 많은 것을 얻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멈추어 바라보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기도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주목이다.
그리고 신앙이란,
세상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주목하는 중에 끝내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다.
-환경주일을 맞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