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칼럼

관조하는 삶과 신앙의 만남

  • 관리자
  • 2025-07-22 08: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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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한다.
일하고, 성과를 내고, 스스로를 증명하라고 채근한다.
쉼조차도 재충전을 위한 수단이 되고, 여가는 생산성을 위한 전 단계로 전락했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결핍이나 게으름으로 간주된다. ‘무위’는 더 이상 삶의 한 방식이 아니라,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비생산성의 낙인처럼 여겨진다.

한병철은 『관조하는 삶』에서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 강박을 통찰한다.
그는 현대인이 ‘행위’와 ‘성과’에 중독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진정한 인간다움은 오히려 ‘멈춤’과 ‘응시’, ‘머무름’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관조를 단순한 명상이나 내면 지향의 태도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과 세계를 목적이 아닌 존재로 마주하는 방식이며, 인간 존재의 깊이에 도달하게 하는 사유의 형태다.

이러한 관조의 시선은 신앙과 깊이 연결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도란 말을 많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을 듣는 일이다. 예배란 감동적인 공연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거룩하신 분 앞에 나아가 조용히 머무는 시간이다. 신앙은 언제나 활동보다 관계를 먼저 묻는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종교마저 상품화했다.
예배는 감정의 소비재가 되었고, 설교는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의 기술이 되었다.
교회는 성장과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에 뛰어들었고, 신앙은 효용성과 결과로 평가받는 체계 속에 갇혔다. 사람들은 예배에서 유익을 기대하고, 신앙생활의 보상으로 축복을 요구한다. 종교가 시장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관조는 더 이상 신앙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무위의 신앙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고백이며, 결과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신뢰하는 태도다.
무위는 신앙의 나태가 아니라, 인간의 자리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일곱째 날 쉬셨고, 그 쉼은 창조의 완성이었다. 쉼은 일의 중단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에서 오는 안식이다.

관조하는 신앙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빠르게 판단하지 않고, 조급히 결론내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리는 영성을 지닌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 하며, 주장하기보다 경청하고, 반응보다 응시를 택한다. 이런 신앙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능률적이고 심지어 무기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느림과 머무름 속에 하나님이 임하신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모세가 신발을 벗고 섰듯이, 관조하는 신앙은 성급한 개입을 멈추고 그저 서 있는 태도를 회복하게 한다.

오늘의 예배가 여전히 거룩한가, 오늘의 신앙이 여전히 본질적인가를 묻는 이들에게 관조는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하지 않아도, 더 자극적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침묵 속에서도, 무위 속에서도, 작고 느린 걸음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관조하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존재 그 자체로 서는 연습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영적 회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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