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묵상 19 –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4:7-12)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혼자 있어서 형제도 없고 자식도 없지만,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고, 눈은 부를 향한 갈망으로 가득하다…
그러고도 그는 ‘내가 누구를 위해 이처럼 수고하며 내 삶의 기쁨을 포기하고 있는가?’ 묻는다.”
(전도서 4:7–8)

코헬렛은 다시 해 아래의 허무를 바라본다.
혼자 있는 사람.
쉬지 않고 일하고,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그는 문득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 모든 수고를 하고 있는가?”
그가 그렇게 묻는 이유는
수고에는 지치고 기쁨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목적 없는 노동’,
‘관계 없는 성취’는 결국 허무로 이어진다.
일이 많아도 삶이 비어 있는 사람,
가지고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사람.
그의 내면은 고요한 절망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전도자는 말한다.
혼자보다 둘이 낫다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사람이 있고,
함께 있을 때 추위를 이겨낼 수 있으며,
외로움과 무력함 속에서 서로 기대며 걸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말이 ‘함께 있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세 겹 줄’이라는 말은 한국교회에서 종종 잘못 인용되기도 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묶인 철옹성 같은 공동체를 말하면서
개인의 고통이나 외로움은 무시하거나 감추는 방식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함께’만이 아니라 ‘홀로 있음’ 또한 소중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모든 시간에 함께 있을 수는 없다.
태어남과 죽음,
가장 깊은 고통과 가장 내밀한 질문은 언제나 ‘홀로’의 시간에 마주하게 된다.
홀로의 시간을 회피하면, 함께 있음의 의미도 흐려진다.
자기 삶에 충분히 머무를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삶에도 진심으로 동행할 수 있다.
‘우리’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고유함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공동체는 서로의 ‘홀로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고독을 안고 함께 걸어가는 동행이다.
누군가의 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자신의 짐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아는 사람만이
누군가에게 참된 위로가 될 수 있다.
전도자는 고독과 공동체 사이, 그 절묘한 균형을 가르쳐 준다.
홀로 있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함께 있는 삶도 성숙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세 겹 줄’의 튼튼함 이전에
‘한 줄’로 버티는 삶의 고요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