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 것 없는 세상, 그러나 새로운 존재
“이미 있었던 것이 다시 있을 것이고, 이미 한 일이 또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
– 전도서 1:9
전도자는 선언한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어떤 것이든 ‘이것이 새 것’이라고 말해 보아라. 그것도 이미 오래전에 있던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긴다.
과연 정말 ‘새 것’은 없는가?
우리가 느끼는 새로움, 창조성, 변화와 전환의 순간들은 모두 착각일 뿐인가?
전도서의 언어는 극단적으로 보일 만큼 냉정하다.
그러나 그 언어는 단순한 비관주의가 아니다.
그는 ‘해 아래’—곧 하나님 없는 세계, 시간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에 갇힌 세계—안에서 인간의 한계와 순환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다.
해 아래는 ‘새로움이 부재한 세계’
‘해 아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영적 상태다.
하나님 없는 세계는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그 반복 속에는 방향도 의미도 없다.
아무리 애써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다람쥐 쳇바퀴 같다.
그래서 새한글성경은 1장 8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모든 것이 지쳐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고, 귀는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지친 삶에는 새로움이 없다.
지쳐 있다는 말은 곧, 의미를 잃었다는 뜻이다.
쉼 없는 노동, 반복되는 일상, 생존만을 위한 분투.
‘새 것 없음’은 결국 새로움을 느낄 수 없는 감각의 마비를 말한다.
그러나 그 반복이 모두 무의미한가?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새 것 없음’이 진부함을 뜻하는가?
반복되는 삶은 곧 의미 없는 삶인가?
이 두 가지를 동의어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삶 전체를 ‘헛됨’으로 받아들이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 유혹에서 멈추지 않는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지만, 해 위에는 새 것이 있다.
전도서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새 것 없음’은 하나님을 떠난 삶의 조건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선언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전도서의 선언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 것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새 것은 곧 거듭남이며 성화이며 구원이다.
사도 요한은 하늘과 땅이 새롭게 되는 환상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 21:5)
새 것은 ‘느낌’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우리는 종종 새로움을 ‘새롭다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새로움은 존재 자체의 전환이다.
바뀐 조건 속에서, 바뀐 관계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새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이라 해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눈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날은 결코 ‘진부한 날’이 아니다.
구원의 빛으로 해석된 하루는 항상 새롭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세상은 반복되고, 인간은 지친다.
해는 뜨고 지고, 바람은 돌고 돌아, 강은 흐르지만 바다는 차지 않는다.
그런 삶은 진부한가?
아니다.
거기에는 ‘충실함’이라는 새로움이 있다.
거기에는 진리의 일관성이라는 은혜가 있다.
거기에는 묵묵히 돌아가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우는 길이 있다.
새로움은 항상 파격적인 변화나 혁신의 형태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새로움은 때로 동일함 속에서 발견되는 깊이이다.
마치 어제와 똑같이 보이는 하늘이 오늘은 유난히 눈부신 것처럼,
반복되는 말 가운데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처럼,
진리는 다르지 않음으로 새롭다.
그리고 이 말 한마디로 우리의 고백을 정리할 수 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 이 죄인 살리신 주”
세상에는 새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새로워질 수 있다.
구원은 존재의 새로움을 선물하고, 성화는 그 새로움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