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칼럼

욥기 묵상 39-신비 앞에 선 자, 욥

  • 관리자
  • 2025-06-28 06:00:00
  • hit358
  • 219.251.41.124

욥기 39-신비 앞에 선 자,

 

하나님의 질문이 계속된다.
이번에는 들짐승과 날짐승, 거칠고 제멋대로인 생명들이다.
들나귀, 들소, 타조, , , 독수리...
이들은 인간의 손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묻는다.

누가 나귀를 놓아 주었을까?
누가 들나귀 얽어맨 것을 풀어 주었을까?
내가 들나귀 집으로 마른땅을 주었지.
들나귀 머물 곳으로 소금 땅을 주었지.
들나귀는 시끌벅적한 성읍을 비웃고,
몰이꾼이 소리 질러도 듣지 않아.”(39:57)
네가 들소에 밧줄 묶어 밭고랑을 갈게 할 수 있을까?
들소가 힘세다고 믿을 수 있을까?
들소가 너의 씨앗을 가져오리라 믿을 수 있을까?”(39:1012요약)
네가 말에게 힘을 주었느냐?
그 목에 갈기를 덧입혀 주었느냐?”(39:19)
너의 깨달음 덕분일까,
매가 날아올라 남쪽으로 날개를 펼치는 것이?”(39:26)

하나님의 질문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
인간의 질서로는 다룰 수 없는 세계를 향한다.
그러나 그 생명들 안에는 고유한 질서와 조화가 흐르고 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계획과는 다르며, 논리와 규범을 넘어선다.

인간은 끊임없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기후변화도, 전쟁도, 질병도, 심지어 타인의 고통조차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
그러나 인간은 정작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말은 많지만 신비에는 닿지 못한 까닭이다.
마치, 지혜를 빼앗긴 타조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지혜를 빼앗은 거야.
깨달음을 나눠주지 않았던 거야.”(39:17)

타조는 자기 알을 땅에 버려두고,
발에 밟히거나 짐승에게 먹힐까 걱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타조에게 지혜를 주지 않으셨다고 하셨지만,
그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방식 속에 놓여 있다.
타조는 지혜 없음 그대로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반면 인간은 지혜가 주어졌음에도 마치 없는 것처럼 오만하게 살아간다.

왜일까?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피조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빈 윌 커머러(Robin Wall Kimmerer, 1953~)는 이렇게 말했다.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땅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1)

하나님은 설명이 아니라 생명을 보여주신다.
그 생명들은 인간의 통제 밖에서 살아가며, 야성 속에 질서를 품고 있다.

들소의 야생성,
타조의 어리석음,
말의 전쟁 본능,
독수리의 높은 보금자리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윤리 체계보다 깊고, 인간의 논리보다 넓다.
욥은 논리로 고통을 풀려 했고,
그의 친구들은 규범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숨결을 간직한 존재이며,
각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자연과 분리된 저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피조물 안에 숨결처럼 머무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바로 범재신론(panentheism)의 신학이다.2)

하나님은 만물을 초월해 존재하시지만, 동시에 만물 안에도 거하신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숨결을 머금은 존재이며,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며
, 자연 안에서 현존하신다.
그분은 들짐승 안에, 날짐승 안에, 거칠고 자유로운 생명들 안에 계신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 너머에 계신다.

하나님의 질문은 욥을 논리의 자리에서 경외의 자리로 이끄신다.
이제 인간의 해석은 침묵하고, 하나님의 신비가 노래한다.
진짜 하나님은 말과 지식이 아닌 놀라움과 신비, 통제가 아닌 자유로 다가오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 이렇게 말했다.

신은 사자에게 이빨을, 제비에게 날개를, 인간에게는 질문을 주셨다.
답이 없는 질문이야말로 인간이 신을 닮은 증거다.”3)

하나님의 방식은
계산되지 않지만 질서가 있고
, 거칠지만 깊은 평화를 품는다.
하나님은 욥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으신다.
대신,
설명되지 않는 생명들을 보여주시며,
그 신비 속에 함께 머무르게 하신다.
답 없는 질문을 통해서 신비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욥은 그 생명들의 자유와 질서를 바라보며,
무너진 삶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숨결이 흐르고 있음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그렇게 욥은, 이해를 멈추고 신비에 머무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설명하지 않으셨다. 대신, 질문하셨다.
나의 질서,
나의 논리,
나의 정당함을 넘어선 세계를 보여주셨다.
나는 묻는 자였지만, 이제는 듣는 자로,
이해하려 했던 자에서 머무는 자로 초대받는다.


:
[1] 로빈 윌 커머러, 향모를 땋으며, 에이도스, 노승영 옮김, 2021, P.25.
[2]
범신론(Pantheism)= 자연혹은 신은 곧 우주 전체다라고 보며, 신과 세계를 동일시한다.. 이 관점에서는 초월적인 인격신의 개념이 사라지며, 하나님은 자연 그 자체와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범재신론(Panentheism)자연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하나님은 자연을 초월한다고 본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충만하게 임재하시며, 동시에 우주를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 고백하는 것이다. ,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만, 범재신론은 하나님이 세계 안에 계시되 그 너머에도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신학적 입장이다.
[3]
이 문장은 릴케의 공식 저작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유를 요약하거나 재구성한 명상적 문장으로 널리 인용된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