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8장-하나님은 질문하시는 분이시다
침묵이 길었다.
친구들은 말했고, 욥도 말했고, 엘리후는 거칠게 쏟아냈지만,
하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 폭풍 속에서 말씀하신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알지도 못하고 말하니 내 본뜻을 가리는구나.”(38:2)
이 말씀은 위로도 아니고, 변명도 아니고, 연민도 아닌 질문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기초로부터 욥을 초대하신다.
“내가 땅바닥을 깔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땅의 크기를 누가 정했는지 네가 아는 것이냐?
땅 받침이 어디에 묻혔을까?
바다가 못 나오게 누가 문으로 막았을까?
빛이 사는 곳엔 어느 길로 갈까?
눈 창고에 가보았느냐?
누가 팠을까, 큰물이 갈 길을?
얼음은 누구의 뱃속에서 나왔을까?
누가 지혜로워 구름을 헤아릴 수 있을까?”(38:4~41 요약)
하나님의 질문은 논박이나 압박이 아니라,
그것은 경외의 문을 여는 초대이며, 신비로 들어가는 문턱이다.
욥은 반박할 수 없지만,
그 말은 꾸짖음이 아니라 은밀한 초청이다.
하나님은 욥을 지적 논쟁의 장이 아니라,
신비의 자리로 이끄신다.
인간의 말이 멈추자 비로소 하나님의 질문이 시작된다.
그 질문들은
인간의 논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며,
일종의 신적 반(反)논리,
침묵의 반응,
신비의 언어다.
친구들과 엘리후는 신의 이름으로 욥을 판단했지만,
하나님은 욥의 곁에 다가오셔서 그의 논리의 한계를 넘도록 질문하신다.
하나님은 왜 창조의 이야기로부터 말씀을 시작하실까?
왜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시고, 자연을 묻고, 물으실까?
이 대목에서 나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떠올린다.
“자연은 누구도 위하지 않는다.”
즉, 자연은 인위적으로 누군가를 위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만물을 위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경의 무위(無爲)를 오강남은 이렇게 해석한다.
“너무 자발적(spontaneous)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無爲之爲)’,
'함이 없이 함’이라는 것이다.1)
하나님의 창조 세계도 그러하다.
그분의 피조물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침묵 속에서, 말없이, 감사하게 살아간다.
구름은 질문하지 않고, 해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새는 곡조로, 산은 그 자체로, 바다는 밀려옴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타포적 언어다.
자연은 말하지 않지만,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한다.
자연은 성서가 되고, 피조물은 계시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달랐다.
인간은 자신만을 위해 살기 시작했고,
세상은 점차 ‘나’의 중심으로 왜곡되었다.
감사는 계산으로 바뀌고, 경외는 판단으로 대체되었다.
욥의 친구들, 엘리후, 그리고 욥 자신조차도
‘왜’라는 말로 하나님을 붙잡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묻지 않으시고,
자연을 보라고 하신다.
“눈 창고에 가보았느냐?
우박창고를 보았느냐?
누가 팠을까, 큰물이 갈 길을?
쿵쾅거리며 쏟아지는 비가 갈 길을(38:22,25)
이 질문들은
지식의 부재를 꾸짖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은총의 세계를 다시 기억하게 하는 말이다.
‘왜’ 대신 ‘어떻게’를,
정답 대신 경외와 신비를 회복하라는 초대다.
이 장면은 오늘날 생태신학적 관점에서도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인간 중심의 논리를 내려놓고,
피조물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자연은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깊은 연결고리다.
우리는 자연에게 “왜 존재하느냐”고 묻지 않지만,
자연은 묻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간다.
욥이 묻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하나님은 “너는 창조의 신비를 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이것은 비논리의 회피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회복이다.
고통을 설명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자주 실패하고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설명이 아니라 질문으로 오신다.
그 질문은
자기중심적 신앙을 넘어, 존재 전체와의 관계로 이끄는 문이 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는 듯 단언하는 자들이 있다.
고난을 해석하고, 회개를 명령하고, 타인을 판단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욥에게
“틀렸다”고 말하지 않으신다.
다만 “너는 알지 못한 것이 많다”고 하신다.
그 말은 경멸이 아니라 신뢰다.
하나님은 욥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질문을 통해 새 길을 여신다.
진짜 하나님은 이해되지 않는 자리에서 침묵하시는 분이시며,
인간이 말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질문하시는 분이시다.
참 하나님은
이해되지 않는 자리에서 침묵으로 함께하시는 분이시며,
인간이 말을 멈출 때 비로소 질문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설명이 아닌 동행으로,
정답이 아닌 신비로,
판단이 아닌 질문으로 찾아오신다.
주:
[1] 노자(B.C.571~?), 『도덕경』, 오강남 풀이, 현암사, 2009, p.26. 제2장 해설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