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칼럼

욥기 묵상 37-틀리지 않지만, 옳지 않다

  • 관리자
  • 2025-06-26 06:00:00
  • hit272
  • 219.251.41.124

욥기 37-틀리지 않지만, 옳지 않다


엘리후는 마지막 말을 이어간다.
그의 언어는 크고 웅장하며,
하늘과 구름, 천둥과 번개, 바람과 우레를 끌어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의 말은 시처럼 흐르고 성전의 찬양처럼 울려 퍼진다.

또 이 일로 제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아니, 제자리에서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그분의 사나운 소리를 똑똑히 들으십시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우르릉 소리를요.”(37:1,2)

엘리후는 하나님의 힘과 위엄을 강조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설명 가능한 존재로 축소하고 만다.
누가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는가?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비 자체이시며,
설명이 아니라 경외와 침묵으로 마주해야 할 존재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듣지 못한 자다.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지만,
그 노래 속에는 고통받는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눈물과 아픔이 없다.

엘리후는 말한다.

구름은 그분 이끄시는 대로 빙빙 돌고 뒤집으며 일합니다.
대륙 위에서 땅에 하라고 그분이 명령하신 모든 일을요.
때로는 그분의 땅을 치는 회초리로,
때로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름을 보내주십니다.”(37:12,13 )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일을 맡기시는지를 아십니까?
어떻게 그분의 구름을 번쩍거리게 하시는지를?”(37:15)


엘리후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지만,
그의 신학은 관념의 언어에 갇혀 있다.
그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고,
찬양을 외치지만, 그 찬양은 고통을 침묵시키는 연설일 뿐이다.

하나님은 힘이 크신 분이시지요.
정의와 넉넉한 공의를 거스르시지 않지요.”(37:23)

그 말은 옳은 듯 보이나,
고통 앞에 선 욥의 절규를 무시하는 말이다.
그가 정말 하나님을 경험했다면, 그 자리에선 감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틀리지는 않았지만, 옳지 않다.”

엘리후의 말은 논리적으로 정연하고,
신학적으로 정확해 보이지만,
듣는 이를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찌른다.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 있고,
경험하지 못한 진리에 대한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사람을 가르치신다고 말한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 그 앞에 있는 욥의 고난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욥은 이미 의로운 자였다.
그의 고난은 훈육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신비였다.
오늘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고난도 다르지 않다.

엘리후는 거침없이 말한다.
하나님의 정의와 섭리를 논리로 해명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조차, 욥 앞에서는 설명하지 않으시고 함께하셨다.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침묵과 눈물, 동행이었다.
그가 말할수록, 그의 설교는 점점 더 공허해졌다.

법정 스님(1932~2010)무소유에서 말한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1)

그렇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뿐 아니라,
너무 슬플 때에도, 너무 고통스러울 때에도 우리는 말을 잃는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고,
욥의 고통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통받는 이를 정죄하고 해석하려 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결코 옳지 않았다.
그의 말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정의를 말하지만,
정작 고통당하는 이의 자리에 설 수 없었고,
그가 말하는 신학은 사실을 담고 있었으나, 진실에 이르지 못했다.

정답은 공감을 대신할 수 없고,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생명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말은 사랑의 말이지만,
생명을 죽이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몰아세우며
,
결국 고통을 외면한 폭력의 언어를 구사한다.

오늘날에도 문자주의자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이율배반적인 언어를 반복한다
.
특히 사회적인 약자를 혐오하고 차별하거나,
고통받는 이를 정죄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 혐오는 신성모독이다.
문자는 죽이고, 성령은 살린다”(고후 3:6)는 말씀처럼,
신앙은 생명을 살릴 때에만 진리가 된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엘리후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 침묵이야말로,
말을 가장 많이 한 자가 가장 멀리 있었음을 증언한다.

엘리후의 말은 웅장하고 시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문 없는 확신의 위험
,
경외 없는 교만의 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소리를 말했지만
,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했지만,
하나님의 자비가 살아 있는 사람 곁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을 단언하는 이들이 정작 하나님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
.
진짜 하나님은
웅장한 연설이 아니라
,
찢긴 영혼 곁에 조용히 앉아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웅장한 말보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상한 자의 가슴을 어루만지신다.
하나님은 설명이 아닌 동행으로 응답하시며,
사랑 없는 정의는 진리가 아님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 결코 옳지 않았다.


:
[1]
법정, 무소유, 범우사,1999, P.103. ‘침묵의 의미에 관한 글의 일부다. 법정 스님은 동시에 비겁한 침묵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