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6장- 고난이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이 장에서는, 타인의 고난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은 자의 ‘위대한 설교’를 마주한다.
엘리후는 이번에도 단호하다. 아니, 더욱 확신에 차 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위해 할 말이 남아 있어요.
참으로 제 말을 거짓말이 아닙니다.
지식이 완전한 사람이 어르신 곁에 있는 것이에요.”(36:2,4)
그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강하시고,
약한 자를 살피시는 분이라 말한다.
또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면 회복되지만 거부하면 멸망한다고 단언한다.(36:5–12 요약)
말만 놓고 보면 옳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이가 ‘욥’이라는 사실이 모든 것을 바꾼다.
그의 말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말이 되고 만다.
피 흘리는 이의 아픔을 앞에 두고 건네는 말은
진실보다 공감이 먼저여야 하지 않는가?
엘리후는 욥에게 “스스로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노여움의 시험에 빠지지 말라고 말한다.(36:18)
그리고 연설의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위엄과 자연 속의 질서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물방울을 끌어 올리십니다.
하나님은 구름이 비를 흘러내리게 하십니다.”(36:27,28)
장엄하고 찬란한 자연의 섭리,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욥은 고난이라는 포경 밧줄에 매여 있는 사람이다.
허먼 멜빌( Herman Melvill ,1819~1891)의 『모비 딕』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르고 태어난다.
삶의 위험은 고요하고 은밀하며 늘 우리 곁에 있지만,
그것을 깨닫는 건 언제나 갑자기 방향을 튼 죽음과 마주할 때다.”1)
삶이 흔들릴 때, 신조차 멀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욥은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다.
다만 고난의 밧줄에 매인 채,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의 무게 앞에서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욥의 삶은
모비 딕을 쫓다 고래 등 위에서 흔들리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2)
이 장은 엘리후의 말 가운데 가장 논리적이며,
설교처럼 잘 짜인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여전히,
고통받는 자의 자리에서 충분히 멈춰 서지 못한다.
신학이 아무리 정연할지라도 눈물 앞에서는 잠잠해야 한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말씀하실 수 있지만,
그 고난이 누구의 것인지,
그 눈물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엘리후는 옳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정이 없고, 눈물이 없었으며,
고통 받는 자 앞에 낮아진 사랑이 없었다.
진짜 위대한 말은
하늘의 섭리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고통당한 이의 상처 위에 조용히 손 얹는 말이다.
고난을 통해 무엇을 배웠느냐는 물음은
고난을 통과한 이가 스스로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이가 묻는다면 그 질문은 칼날이 되고 만다.
로마서는 말한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롬 5:3)
그러나 그 말씀조차,
고난을 이겨낸 자의 입에서 나올 때만 은혜이지,
고통 위에 선 자를 향해 던져지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 오만이 된다.
흔들리는 자에게 필요한 건 교훈이 아니라,
함께 흔들려주는 사람이다.
욥은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등을 돌리신 듯한 삶 속에서 흔들릴 뿐이다.
그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찾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삶이 요동칠 때, 신조차 멀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믿음 없음이 아니라,
침묵 속 하나님을 부르짖는 깊은 질문이다.
욥은 그런 결핍 속에 있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고,
그러나 침묵하고 계시기에 무너졌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자리였다.
‘하나님의 부재’는 욥을 더욱 강하게 하나님을 붙잡게 했다.
오늘의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맘몬을 섬기며,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우상의 공허 속에 산다.
그들이 따르는 ‘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돈, 성공, 이미지, 소비, 효율 같은 물신(物神)이다.
그런 것들이 결코 생명을 줄 수 없기에,
아무리 소유해도 그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욥은 부재의 하나님을 붙들며 절규했다.
그러나 오늘의 사람들은 부재의 하나님조차 찾지 않으며,
침묵하는 우상을 향해 예배를 드린다.
오늘날의 교회도 엘리후의 신학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다.
고난을 교훈의 기회로 삼으려 하고,
고통을 신의 징계 혹은 훈련이라 단정 짓는다.
그 말들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지만,
부분의 진실이 전체의 진실이 아닐 때, 그 말은 폭력이 된다.
의로운 이들의 고난,
선한 자들이 이유 없이 당하는 상실,
세월호의 아이들과 그 부모들,
이태원에서 쓰러진 청년들과 남겨진 이들의 눈물은
아직 어떤 교훈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그래서 교회의 말은 공허하고,
신앙인의 자부심은 현실을 비껴간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말라.
비상식적인 신앙이,
상식적인 삶을 사는 이들의 마음에 벽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진실을 향한 신앙은 ‘모르는 것’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주:
[1]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모비 딕』, 현대지성, 이종인 옮김, 2025, p.361.
[2] 위의 책, 소설에는 고래 등 위에서 흔들리는 인간에게는 신의 위대함 조차도 공허하다는 의미가 곳곳에 담겨있다. 신의 부재와 침묵 속에 욥에게도 이런 헛헛함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욥을 지나치게 믿음의 사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에 대한 확고한 확신보다 흔들림, 신에 대한 의심, 여기에서 표층신앙은 심층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