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칼럼

욥기 묵상 35-고통을 무시한 폭력의 언어

  • 관리자
  • 2025-06-24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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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5-고통을 무시한 폭력의 언어



엘리후는 욥에게 묻는다.

어르신은 이런 것을 정의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르신은 말씀하셨어요.
나의 공의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
어르신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무슨 도움이 됩니까? 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제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해서요?’”(35:2,3)

엘리후는 욥이
공의롭지도 않은데 공의로운 척하며
그 공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니
그 말은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욥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하나님께 대화를 시도했을 뿐이다.

엘리후는 말한다.
욥이 죄짓는다한들 그분은 밑질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다고.(35:6)
그러므로 욥의 탄식은 헛되다는 것이다.

정말, 헛소리는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습니다.
샷다이께서는 그런 것 살피시지 않아요.”(35:13)

그는 말끝마다 욥이
말이 많고, 입만 놀리고,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몰아붙인다.

그런데 욥 어르신은 쓸데없이 입을 벌리십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늘어놓고 계시네요.”(35:16)

그러나 그 말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탄식하며
그 관계를 끝내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말이다.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타자의 고통 앞에서 가볍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쉽게 단정하지도 않는다.
엘리후는 젊은 열정으로 진리를 말하려 했지만,
타인의 고통을 알지 못하면서, 진리를 말하는 자는 진리를 왜곡할 수밖에 없다.

엘리후는 말한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시기에 네가 기다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응답이 없더라도 기다린다.
말없이 기다리는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믿음은 자라나는 것이요,
끊어진 듯 위태롭던 실이 풀 먹인 실처럼 단단해지는 것이다.

엘리후 같은 이에게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하나님 앞에서 성급하게 입을 열지 마세요.
조급한 마음으로 말을 꺼내지 마세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대는 땅에 있어요.
그러니 말을 많이 하지 마세요.”(5:2)

말이 많으면 죄가 그치지 않지만,
입술을 삼가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야.”(10:19)

사람마다 듣기는 재빠르게 하고,
말하기는 더디게하십시오.”(1:19)

엘리후는
하나님 대신 떠들고
,
타인의 고통을 정죄하며,
침묵하지 않고 떠들어댄다.

김소연 시인(1967~)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아둔한 말은 누군가를 꾸짖는 말이다.
무섭게 가르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마음은 닫히기 때문이다.”1)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과 욥의 말에 대해 아둔하다고 꾸짖지만
,
정작 자신의 말이 아둔한 말임을 알지 못하니,
하늘의 영을 받아 지혜를 얻었다고 하지만 아둔하기 이를 데 없는 자이다.

욥의 탄식은 조리가 없는 듯 했지만,
고통의 강을 지나 하나님께 닿으려는 외침이었다.
엘리후의 말은 조리가 있는 듯 했지만,
타자가 겪는 고통을 외면한 헛소리였다.

엘리후는 말한다.
그런데 욥 어르신은 쓸데없이 입을 벌리십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늘어놓고 계시네요.”(35:16)

이 말은 고통 속에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자에게 돌을 던지는 폭력의 언어이다.
진짜 무지는 알량한 입으로 사람을 짓밟는 교만이다.
침묵할 자가 떠드는 시대의 침묵은 지혜의 자리를 잃는다.

욥도 말이 적지는 많았지만,
그 말에는 고통과 상처가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후의 말은
하나님의 이름과 온갖 아름답고 의로운 말들로 포장되었지만
,
욥과 그의 친구들을 이기고자 하는 칼날 같은 폭력의 언어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말은 그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한다.

소설가 김연수(1970~) 소설가는 달리기를 통해서 깨달은 바를 이렇게 말한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 다는 말이 반드시 이기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2)


엘리후가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공격자가 아니라
치유자로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

그는 욥의 말에 흠을 잡기보다,
그 속에 담긴 아픔과 하나님을 향한 절규를 들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늘어놓기보다,
말없이 함께 있어주는 침묵의 동반자가 되었을 것이다.

치유하는 말은 정확한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도,
그 말에 눈물이 묻어 있고,
그 말에 함께 짊어진 고통의 흔적이 있다면,
그 말은 생명을 품은 언어가 된다.

욥은 이해받고 싶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외치고,
누군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기를 바랐다.
엘리후는 그 말의 조리를 따지기에 바빴고,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외침을 깎아내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정직한 외침을 들으셨다.
어쩌면 치유하는 말은 말이 아닐 수도 있다.

한 줌의 침묵,
작은 한숨,
어깨에 손을 얹는 따뜻한 동작,
그리고
"그래, 나도 네 말이 다 이해되진 않지만네 마음이 느껴져.”
라는 말 한마디.

말은 칼이 될 수도 있고,
솜이불처럼 품어주는 언어가 될 수도 있다.

엘리후는 칼을 들었고, 욥은 칼에 베어 피를 흘렸다.
그러나 욥의 탄식 속에서 하나님은 진실을 들으셨고,

엘리후의 정의롭다는 말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시다.
말의 진실은 정답 여부가 아니라,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가에 있다.
엘리후의 말은 교만에서 나왔고,
욥의 말은 고통에서 나왔다.

교만의 언어는 옳아도 사람을 죽이고,
고통을 통과한 언어는 어설퍼도 진실에 가깝다.


:

[1] 김소연, 한 글자 사전, 마음산책, 2022, p.131.
[2]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마음의숲, 2012,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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