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4장-엘리후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엘리후는 다시 입을 연다.
그는 듣는 자들을 불러 모으고,
자신의 말을 지혜롭고 정의로운 판단으로 여기도록 유도한다.
"지혜 있는 여러분, 제 말을 들으십시오.
지식 있는 여러분, 제게 귀를 기울이십시오.” (34:2)
그는 욥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나는 공의로워.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마땅한 권리를 물리치셨어.
나의 마땅한 권리를 두고 내가 거짓말해야 할까?
나는 죄도 없이 화살에 맞아 죽게 생겼어.”(34:5,6)
엘리후는 이 말을 문제 삼고는 곧바로 결론을 내린다.
“아, 정말, 욥 어르신은 계속 시련을 겪어 보셔야 해!
못된 사람들처럼 어르신이 대답하시니까요.
욥 어르신은 자기 잘못에다 죄를 더하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손뼉을 치시는군요.
하나님 앞에서 말을 늘어놓고 계시는군요.”(34:36,37)
그는 말끝마다 하나님은 정의롭다고 외친다.
“하나님은 불의와 거리가 머십니다.
샷다이께서는 옳지 않음과 거리가 머시지요.” (34:10)
그러나 그 말은 욥의 항변을 오해한 채,
하나님의 공의를 앞세워 고통받는 자를 침묵시키려는 논리로 바뀌고 만다.
하나님의 정의는 진리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것인가?
엘리후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지만,
그 정의는 철저히 자기 논리 안에 갇힌 정의에 불과하다.
그는 말한다.
“사람에게 그의 행동대로 되갚아 주십니다.
각자 걸은 길에 따라 되찾게 하시지요.”(34:11)
이 말은 그 자체로 틀리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그 기준으로 욥을 정죄하려 든다는 데 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옹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확신을 옹호하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엘리후는
오늘 날 하나님을 말하는 모든 자들의 대명사가 아닌가?
그렇게 엘리후는 하나님을 말하는 자로서의 책임을 망각한다.
이제 우리는 그의 말 안에 숨겨진 폭력성과 침묵의 강요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러나 그 입은 정죄의 칼이 되고,
그의 말은 고통의 무게를 지우지 못한다.
그는 정의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 정의는
불의한 침묵이 되어 욥을 찌른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외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그의 말 안에 없다.
그리고 엘리후는 욥의 고통을 교만의 결과로 결론짓는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한 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억울한 자의 울음을 들어주는 마음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옹호하려 하다가 고통받는 자를 짓밟는다.
하나님을 말하는 자는 그 말 안에 반드시 사람의 고통을 담아야만 한다.
엘리후는 쉴 새 없이 욥의 말을 인용하며 반박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익숙한 전통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새로운 통찰이 아니라, 전통적인 지혜자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엘리후는 자신의 신학과 논리를 확신하며, 마치 자신이 진리의 수호자인 양 말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관념적이고 일방적이다.
엘리후의 논리대로라면,
숨어 계시는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신은 반드시 보응하신다고 말하지만,
이 세계의 현실은 그 말을 부정한다.
바다 건너 침묵 속에서 사라진 아이들,
불에 타오른 도시와 잿빛 하늘 아래 무릎 꿇은 민족들,
강제된 침묵과 부정된 이름들,
수많은 시대의 수많은 욥들 앞에서 엘리후의 논리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지만,
그 정의는 욥의 하소연을 외면하며 차가운 판단으로 나타난다.
그는 무례하고 논쟁적이며, 욥의 말을 비틀고 왜곡한다.
그의 비판은 인격을 존중하지 않으며, 선을 넘는다.
리처드 로어는 엘리후와 같은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엘리후는 우월한 위치에서 말한다.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고, 너는 그렇지 않아. 너는 어리석고 멍청해. 이제 내 말 좀 들어.’ 우리는 그런 사람의 말을 좀처럼 듣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1)
진리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리는 낮아지고 경청하며 전해져야 한다.
엘리후의 말이 울리지 않는 것은,
그의 말 안에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주장하면서 현실의 부조리함을 간과하는 태도는
신학을 왜곡된 도구로 만들 위험이 있다.
정의로운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그의 말은 욥에게 2차 가해가 되고 있다.
엘리후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하나님을 옹호한다.
세상 또한 비현실적인 낙관 속에서 바라본다.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이론적인 신학적 담론은
고통받는 자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엘리후의 말은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 있다.
그는 논리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그 말은 고통을 무시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삶의 부조리 앞에서 고통으로 비틀거리는 사람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일은
결코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폭력이다.
엘리후는 욥의 삶에서 생긴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설명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말은 장황하지만 비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신학을 말하지만, 그 말 안에 고통이 담기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
고통을 외면하는 말은,
정의를 말해도 정의가 되지 못한다.
말은 칼이 될 수 있고,
침묵은 눈물이 될 수 있다.
신학이 생명을 품지 못할 때,
그 말은 하나님의 진리에서 가장 먼 곳에 서 있게 된다.
어쩌면, 엘리후는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엘리후의 말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말을 이어가며, 이제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려 한다.
주:
[1] Richard Rohr, 『Job and the Mystery of Suffering – Spiritual Reflection』, A Crossroad Book, 1996, p.148. “Elihu the teacher”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