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3장-겸손을 입은 교만
엘리후가 입을 연다.
"그렇지만 욥 어르신, 제 말씀을 좀 들어보십시오.
제가 드리는 모든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33:1)
그의 말은 “그렇지만”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단지 말머리가 아니라, 폭력의 시작이다.
이 말은 신앙의 이름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진리를 가장한 교만으로 고통을 해석하려는 자들의 첫 문장이다.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말을 “그렇지만”으로 덮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통의 해석자가 되려 하지는 않는가?
함께 울기보다, 가르치려 하지는 않는가?
엘리후는
자신의 말은 올곧는 마음에서 나왔고,
입술은 순수한 지식을 말하고,
하나님이 영이 자신을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숨결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말한다.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인식,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본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도 가져야 할 아름다운 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긍정이 ‘과잉’된 순간부터 시작된다.
엘리후의 말에는 자신에 대한 의심이 없다.
자신의 말은 진리요,
자신의 관점은 바르고,
자신이 전하는 해석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욥의 말은 틀렸고,
욥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으며, 고난은 그의 완고함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확신에 찬 종교인의 언어가 가진 위험성이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은, 타인의 고통조차도 해석하려 든다.
심지어 그것을 ‘사랑’이나 ‘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과잉 긍정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나처럼 말하실 것이다’는 착각으로 흐른다.
엘리후는 욥을 향해 말한다.
“하실 말씀 없으면 어르신이 제 말을 들으십시오.
조용히 계십시오.
제가 어르신께 지혜를 가르쳐 드리지요.”(33:33)
이 말에는 깊은 확신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말이 곧 지혜이며,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고통당하는 이를 향한 공감도 아니고, 동행도 아니며,
위로도 아니다. 그것은 ‘정죄를 포장한 가르침’에 불과하다.
진정한 위로는 말보다 경청에서 시작된다.
고통을 설명하려 하기보다,
함께 침묵하는 용기가 먼저 있어야 한다.
신앙의 언어는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말 앞에서 멈추고,
타인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들으려는 귀 기울임에서 시작된다.
신앙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 확신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자신을 긍정하되,
자기의 말과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늘 나의 해석 너머에 있으며,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침묵의 신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다.
자기 긍정이 신앙의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 긍정이 타인을 무너뜨릴 때,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엘리후는 자기를 믿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믿었다.
신앙은 어쩌면,
“나는 안다”가 아니라,
“나는 알지 못한다”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 모른다.
엘리후는 욥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리고 그의 말은 신학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기 때문이죠”(33:12),
“사실 하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저렇게도 말씀하시는데,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33:14),
“그분은 붙으십니다.
그의 목숨이 죽음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요.”(33:18)
이런 말들은 모두 옳은 진술이다.
문제는 엘리후가 이러한 말들을 욥의 상황과 고통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확신에 따라 사용했다는 점이다.
엘리후는 욥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는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절망과 고통,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탄식하고 절규하는 신앙의 몸부림을 드러냈다.
하지만 엘리후는 욥의 말을 자기 의에 빠진 교만으로 해석한다.
욥이 말한 내용을 발췌하고 요약해 인용한 뒤,
그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다.
이로써 욥의 말은 전체 맥락에서 벗어나 왜곡되고,
엘리후는 마치 법정의 검사처럼 욥의 언어를 잘라 분석하고 정죄하는 위치에 선다.
그의 말은 틀리지는 않았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날카로운 칼이 된다.
설명하려는 태도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 되고, 욥을 더 깊은 고립과 침묵 속으로 밀어 넣는다.
진리는 언제나 타이밍과 방식,
그리고 ‘누구에게’라는 질문과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그것이 고통받는 자의 상황을 무시한 채 던져질 때,
그것은 오만한 말이 된다.
엘리후는 말의 내용은 바르지만,
말의 자리는 옳지 않았다.
그는 위로를 하지 않고 설명을 했으며,
경청하지 않고 가르치려 했다.
엘리후의 태도는 ‘틀린 말’보다 더 위험한 ‘무례한 정당함’이었다.
이 본문은 오늘날 신앙인이 경계해야 할 한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는 맞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을 듣지 않은 말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 폭력이 될 수 있다.
신앙은 때때로 설명을 멈추고 함께 침묵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경청은 사랑의 시작이며, 침묵은 가장 깊은 기도이다.
욥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엘리후는 지혜를 말했지만 지혜롭지 못했다.
욥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상처가 되었다.
겸손을 입은 교만이 그의 지혜를 가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