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칼럼

욥기 묵상 32 - 말하지 않던 자의 분노

  • 관리자
  • 2025-06-20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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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2- 말하지 않던 자의 분노

 

욥과 친구들의 말이 끝났다.
친구들은 더는 욥을 설득할 수 없었고,
욥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전부 토해냈다.

바로 그때, 지금껏 말없이 듣고 있던 엘리후가 등장한다.
그는 람 가문의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며, 욥과 친구들보다 젊은 자였다.(32:2,6)

엘리후라는 이름은 그는 나의 하나님이다라는 뜻이다.

그는 욥의 친구도 아니다.
친구는 아니었지만, 아마도 곁에서 논쟁을 듣던 제3였을 것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고난을 단순히 죄의 결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훈육, 성숙의 길, 겸손으로 이끄시는
교육적 고난이라는 해석을 덧붙인다.

그러나
여섯 장에 이르는 장황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에 어떤 토도 달지 않으신다.

이는 엘리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머물지 못하고,
결국 허공에 머무는 말로 남았음을 시사한다.

엘리후의 말은 분노에서 기인한다.
그의 분노는 두 방향으로 향한다.
욥이 자신을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여긴 것
친구들이 욥에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정죄한 것때문이다(32:23)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과 같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욥의 항변이 갖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고통의 강을 건너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양명수는 이렇게 말한다.

(엘리후)는 대결하는 신앙을 모르고 있다.
욥이 하나님과 맞선 것은 재앙과 고난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길이다.
하나님과 맞섰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존재의 용기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1)


그렇다.
그는 나이가 들어야만 깨닫는
혹은 경험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는 지혜를 너무 가벼이 여기고 있다.
그의 말처럼
나이가 든 사람이라고 무엇이 옳은지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32:9)’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지혜는 존재한다.
이해하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엘리후는 지금 자신이 이해한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고통당하는 자의 마음과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
그 느낌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엘리후는 자신이 욥과 세 친구보다 젊기에 말하지 않고 참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세 친구가 욥의 무죄 주장을 논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더는 참지 못해 분노하며 논쟁에 뛰어들었다고 말한다(32:5).

그는 스스로 지혜는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에서 온다고 말한다(32:69).

그러나 영은 사람 속에 있습니다.
샷다이(전능하신 분)의 숨결이 깨닫게 하지요.
지혜로운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나이 든 사람이라고 무엇이 옳은지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32:89)

이 말은,
엘리후가 자기 말의 권위를 나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지혜에서 찾으려 한다는 뜻이다.

김회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단락은 예언자 흉내 내기를 통해 자신의 말의 신적 기원을 주장한다.
엘리후는 예레미야 20장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신적 압박경험과 방불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한다.”2)

엘리후는 확신에 차서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인이 된 것처럼 여기고 욥과의 일전을 치르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로 포장할 뿐이다.
그는 겸손한 것처럼 보였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말로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리처드 로어는 엘리후의 등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늘날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나는 그를 분노한 청년세대의 상징, 종종 종교적 신념과 혼동되곤 하는 과도한 열정과 이상주의 전형으로 본다.
엘리후는 마치, 세 시간 짜리 기도 모임이 끝난 후, 다들 노래 50곡 부르고 예언도 47번 했는데,
또다시 등장해서 , 이제 진짜 중요한 말을 할 차례야라고 말하는 사람 같다.”3)

로어는 엘리후의 언어에 깊이 배어 있는 영웅적 이상주의를 지적한다.
그는 진실을 말하려 했지만,
그 진실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자리에서 말하는 설명적 언어였고,
결국엔 과대망상과 자기 확신의 벽을 넘지 못한 진부한 언어로 들린다.

실제로
엘리후의 장황한 말로 이뤄진 여섯 장 없이도 욥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점들이 엘리후의 말이 후대에 삽입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그는 말의 타당성보다, 말하고자 하는 열망에 조급해졌던 이였다.
그는 지혜를 말하려 했지만,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용기,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머무를 줄 아는 기다림의 깊이는 갖추지 못했다.

지혜는 나이에서 자동으로 오는 것이 아니지만,
나이는 지혜의 보증이 아니지만,
고통을 품은 세월은 인간을 다르게 만든다.
세월을 통과하며 생겨나는 인식의 깊이가 분명히 있다.
어떤 고통은 설명보다 침묵으로,
어떤 진실은 말보다 기다림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
리후는 분명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아픔을 통과한 언어가 아니었다.
그는 결국, 말의 타당성보다 말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렸고,
그래서 그의 말은 공허해졌다.
어쩌면 그는 말하지 않음이라는 지혜의 첫 문턱을 넘지 못한 이였는지도 모른다.

침묵, 바로 그 지점에서, 지혜는 시작된다.
그리고 때로는,
늪을 기는 느린 기쁨 속에서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깊이를 만나게 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1901~1981)의 말처럼,
그 기쁨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고통과 쾌락이 엉켜 있는 쥬이상스(Jouissance)’에 가깝다.
이 기쁨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통과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한복판에서,
무력하게 보이는 순간조차 존재의 가장 강렬한 울림이 들리는 자리다.
엘리후는 그 늪을 건너보지 못한 자였다.
어쩌면 그는 말하지 않음이라는 지혜의 첫 문턱을 넘지 못한 이였는지도 모른다.


:

[1] 양명수, 욥이 말하다, 복 있는 사람, 2022, pp.203-204
[2]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욥기, 복 있는 사람, 2023, P.433.
[3] Richard Rohr, Job and the Mystery of Suffering Spiritual Reflection,A Crossroad Book, 1996, pp.145-146. “Enter Elihu(heroic ide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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