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장-고통의 자리에서 기도의 자리로
세상의 고요가 무너진 자리에 또다시 하늘의 회의 장면이 열린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다.
그는 무너졌지만 입을 다물었고, 침묵하였지만 하나님을 놓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무너졌을 때 신앙의 진실이 드러난다.
사탄은 다시 하나님 앞에 서서 묻는다.
“가죽은 가죽과 바꾸지요.
사람은 자신의 목숨 때문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내놓습니다.”(2:4)
그는 말한다.
재산을 잃는 것쯤은 견딜 수 있지만, 자기 몸에 상처가 나면, 그 누구도 신을 믿지 않는다고.
사탄은 욥이 아직 온전한 것은, 그의 건강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신앙은 결국 자기 보호 본능을 위장한 것이라며, 마지막 신체의 방어선을 허물면 욥도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 확신한다.
하나님은 또 다시 허락하신다.
“다만 그의 목숨은 빼앗지 말라.”
이 말은 보호하는 말인가, 아니면 더 깊은 시험에 빠트리는 말인가?
욥의 몸에 악창이 돋는다.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상처가 퍼진다.
그는 잿더미 위에 앉아, 깨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는다.
이는 한 인간이 자기 육체의 한계를 스스로 긁어내는 장면이다.
의식 없는 신음과 반복되는 긁는 손끝,
기도도, 탄식도 나오지 않은 존재의 저 밑바닥에서의 움직임.
이때,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성경은 그녀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결코 작지 않다.
그녀는 욥을 향해 말한다.
“당신은 아직 자신을 나무랄 데 없이 굳게 지키고 계시군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2:9)
그녀는 패역한 자인가?
무신론자인가?
아니다.
그녀는 절망의 깊은 밑바닥에서
신에게 소리치는 인간의 가장 정직한 모습이다.
그녀는 욥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욥이 믿는 하나님을 그녀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가 붙드는 하나님이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고통을 막아주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욥의 아내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서 품고 있는 질문이다.
엘리 위젤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욥의 아내는 욕망이나 악의가 아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욥은 대답한다.
“당신이 우둔한 여자들 가운데 하나처럼 말하는군요.
좋은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만 나쁜 것도 받을 수도 있지 않나요?”(2:10)
그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러나 정죄가 아니다.
그 말에는 분노보다 버팀이, 책망보다 결단이 들어 있다.
욥은 말한다.
복을 받을 때 하나님을 찬송했다면, 재앙 앞에서도 하나님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이것은 승리가 아니다.
이것은 패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마지막 고백이다.
욥의 말은 확신이 아니었다.
무너진 삶 속에서 버틸 수 있는
마지막 신앙고백이었다.”
욥이 다 무너졌을 때, 세 친구가 찾아온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들은 멀리서 욥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의 고통이 그의 존재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옷을 찢고, 재를 날려 하늘로 올린다.
함께 앉아, 칠일칠야를 말없이 머문다.
말하지 않았다.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존재로 위로했다.
이 장면은 함께 있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진정한 위로자는
조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 침묵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침묵이 깨어지면,
신학적인 주장이 시작되고,
오해가 자라고,
고통은 깊어질 것이다.
욥기 2장은
고통이 더 깊어지고, 신앙이 더 아슬아슬해지는 장이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가 가장 진실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욥의 몸은 망가졌고,
그의 아내는 무너졌고,
그의 친구들은 아직 말하지 않는다.
그 적막한 잿더미 속에서 기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 자리야말로 곧 기도가 시작될 자리다.
고통의 자리는,
말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이며,
침묵과 절망이 기도로 바뀌는 경계선이다.
윤동주의 시 <병원>이라는 시가 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시인은 단지,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보는 것으로 그 여자의 건강과 자신의 건강의 속히 회복되길 바란다.
말을 버리고 그냥 거기에 있는 지점이 바로 위로의 지점이고 기도의 지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