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꽃 009 -탱자
[에스겔서 11:19]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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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맛 볼 수 있는 과일을 대라면 제주도의 ‘귤’을 빠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귤과 탱자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탱자와 교접시킨 귤이 당도도 높고 품질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못생기고 시어터진 탱자가 없었다면 달콤새콤한 귤을 맛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탱자는 무엇보다도 가지마다 달고 있는 성성한 가시가 상징인 듯합니다.
가시는 억세고 날카로워서 감히 가까이 할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장 같은 곳에서는 소나 말이 담을 넘지 못하게 하느라고 가시 성성한 탱자나무를 촘촘하게 심기도 했습니다. 제주도에는 말을 풀어 키우는 ‘마(馬)방목지’가 많은데 교래에 있는 몇몇 방목지에는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삼은 곳들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탱자는 모두 그 곳에서 만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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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가시나무’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을 보는 듯도 하고, 내 안에 가득해서 남을 콕콕 찌르는 못된 가시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로 인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나는 끊임없이 남을 찌르고 공격하기 위해 가시를 성성하게 세우는 것 같아 부끄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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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가시는 남을 찌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남을 찌르기 위한 가시는 흉기겠지만 자기를 지키기 위한 가시는 흉기라 할 수 없겠지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이겠지요.
탱자의 성성한 가시만 보면 하얗고 연한 꽃이 핀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예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드럽지 않은 꽃, 연하지 않은 꽃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새로운 것들 중에서 연하지 아니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굳어진 저 가시도 맨 처음에는 부드러웠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는 진리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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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경계가 있습니다.
두 경계 사이에서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지혜를 구하는 일, 그것이 구도자의 길일 것입니다.
진리의 획득 혹은 거듭남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깨달았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점에 서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추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새콤달콤한 귤을 몸에 모시며 탱자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는 날입니다.*
(2021면 1월 9일 묵상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