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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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시대

  • 관리자
  • 2020-10-25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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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8주/ 종교개혁주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시대
요한복음 4:20~24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회는 500여년 이상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해 왔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라는 이름처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과연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혁했는지 자문해 봅니다. 100주년 기념교회를 은퇴한 이재철 목사는 ‘이번 코로나 19는 개신교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개혁하라고 대포를 쏘신 사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세에 수많은 성들이 있었습니다. 성벽을 쌓고 성을 잘 쌓으면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기에, 중세까지는 성벽을 쌓고 성을 쌓는 일은 곧 국방을 튼튼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포’의 등장으로, 대포의 타격과 파괴력이 정밀하고 커질수록 더 이상 ‘성벽과 성’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대포의 등장이 중세의 모든 성벽과 성을 무력화했듯이, 코로나 19는 지금까지의 모든 가식적인 종교적 행위의 근원이 되었던 예배당을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지난 2천 년, 교회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신구교할 것 없이 주일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리지 못한 것을 예로 듭니다. 



지난 2천년간, 예배당은 곧 교회로 인식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유럽의 경우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고 황제나 지방의 유지들이 앞 다투어 자신들의 신앙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 성당 헌당식에서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너무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터키는 사도바울의 복음 전파의 주된 활동지였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지었지만, 종교분쟁으로 지금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사라졌다고 하나님도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 =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부흥은 곧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었고, 성전건축은 곧 신앙심을 확증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교회는 너도나도 성전건축에 몰두하느라, 대사회적인 문제들에 무관심했고, 마치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흡수 통합하듯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무너뜨렸습니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의 교회숫자는 편의점 숫자보다도 많지만,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대사회적으로도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거대한 건물 유지를 위해서, 작은 교회들은 대형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인들을 끌어 모으는데 만 열중합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왜 일어날까요?
하나님께서 성전(예배당)에 계신다는 생각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는 것은 맞지만,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자 사람들은 그곳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여깁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듯 살아가니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성전에 가둬두는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성전=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전에서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행위를 하고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기원전 7세기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종교적인 상업행위에 대해서 실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십니다. 그제야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포로지인 바벨론에도 계시며, 어느 곳에든지 임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들은 다시 성전을 짓습니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 그들은 또다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시며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성전의 거룩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됩니다. 현재, 통곡의 벽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성을 상실하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 종교적인 상업행위가 만연하던 때였습니다. 이미 오래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한 후,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으므로,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늘 편치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그리심산에 세운 성전에도 계실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 가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라 할 수 없는 기구한 운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인이 물을 길러 나온 시간은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입니다. 보통 아낙들은 새벽 동트기 전이나, 해가 질 무렵, 선선할 때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마치, 옛날 우리네 빨래터처럼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와 여인들은 대화를 통해 정보를 교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은 그들을 피해, 그들이 없는 시간에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십중팔구 수가성에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현재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사마리아여인은 뒷담화의 좋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뒷담화의 주인공, 구설수에 휩싸인 주인공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 그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예배를 통해서 해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잘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라고 하니,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신의 예배는 무엇인가 늘 마음 한 구석이 꽉 막힌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이방인보다도 못한 개 취급하며, 자신들이 그리심산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니 헛된 예배라고 주장하는 그 잘난 유대인이 와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빈정거리며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우리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사이가 아닙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에게 차별 당하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 정도의 빈정거림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화를 이어가시고, 여인은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고민하고 있던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 있다고 하더이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리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

이 말씀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이들은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까 아닐까 확신이 없고,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예배하지만,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이나 모두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단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구원의 계보는 유대인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3,24)”

특정한 장소나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하는 모든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둬두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성전은 필요하지만, 성전 장소 자체가 신성시되거나 하나님을 그곳에 가두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장 잘 이해했던 초대교회 집사는 스데반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7장에는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스데반을 모함하는 자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거짓증언을 하고,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고 모함합니다. 그러자 스데반은 6장 14절에 “나사렛 예수가 이곳(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하여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하셨다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란과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요셉이 이집트에  있을 때, 야곱이 세겜에 있을 때,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있을 때, 어느 곳에 있을 때에도 함께 하셨으며 예배를 받으셨다고 반론합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거룩한 곳이며, 성전이며, 예배하는 곳이지 장소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그를 향하여 ‘이를 갈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달려들어’ 그를 돌로 칩니다.



코로나19로 2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신구교 모두 성전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예배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제1차 종교개혁이 교황이나 교권시스템에 대한 투쟁이었다면, 코로나19로 시작된 제2차 종교개혁은 특정 공간으로부터의 출애굽이 될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사야 66장 1절을 기억하십시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66:1)”

그러니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모든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코로나19이후 한남교회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홈페이지 교회비전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아시는지요?


 
우리 한남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추구합니다.
한남교회는,
외형적인 대형교회를 추구하지 않으며, 작아도 건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한남교회는,
교회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한남교회는,
누구나 와서 편안하게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한남교회는,
이 땅의 작고, 느리고, 못생기고, 낮은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한남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는 깨달은 바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입니다.
한남교회는,
모든 연약한 지체를 향해 항상 부드럽지만,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입니다.
한남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과 창조세계의 아픔에 동참하며, 평화의 씨앗을 싹 틔우는 교회입니다.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는 한남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교회를 만들어 갈 때에, 하나님은 한남교회를 통해서 제2의 종교개혁의 비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세워가는 여러분들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로 허락하신 한남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여러분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주님,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귀담아 듣고 보게 하옵소서.
귀한 뜻이 있으셔서 65년 전에 한남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이 교회가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자리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성전으로 바로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음성설교듣기
http://www.podbbang.com/ch/1775820?e=23854729

ppt영상
https://youtu.be/An9ET4rTqwQ

 동영상설교듣기(실황편집)
https://youtu.be/dj2SGQUiW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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