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넷째주일(22300924)
새 사람의 바른생활
요한복음 14:6

오늘은 창조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창조절은 대림절까지 이어지지만, 시월은 종교개혁의 달이고, 종교개혁의 달 특집을 준비하고 있기에 오늘 말씀은 창조절 시리즈 설교 ‘메타노이아’의 결론에 해당하는 설교가 되겠습니다. 첫째 주에는 ‘새 사람을 입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둘째 주에는 ‘새 사람의 언어생활’, 셋째 주에는 ‘새 사람의 물질생활’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새 사람의 바른생활’이란 무엇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른 생활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바른생활’이라는 교과서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이라고 바뀐 것 같습니다. 바른생활이 슬기로운 생활이고, 슬기로운 생활을 하면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시대에 따라 교과의 제목도 잘 바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바른생활이 있으니, 바른 신앙이 슬기로운 신앙이요, 슬기로운 신앙생활이 즐거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새 사람은 바른 신앙에 바로 선 사람입니다. 신앙에 바른 것이 있고 바르지 못한 것이 있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있습니다. 바르지 못한 신앙을 갖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바르지 못한 신앙의 열매는 당장 열리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뒤에 열리기 때문에 그때 가서 후회한들 늦습니다. 바른 신앙은 그 길에 제대로 서 있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란, ‘그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道입니다. 동양사상에서 道는 절대자, 궁극적인 실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道를 아십니까?”하는 질문은 “절대자, 궁극적인 실체를 아십니까?”하는 질문입니다. 노자는 도덕경 1장에서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길(道)’이라고 하신 것의 의미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야 비로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순례자’라고 했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요, 순례자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그대로 걷다가 예수님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순례자를 의미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생활과 일상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일요일만의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주일 혹은 교회에서는 거룩한 신앙인처럼 살지만, 일상의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이들을 꼬집는 말입니다. 저는 신앙생활과 일상의 차이를 줄이는 것, 그래서 일상이 곧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교회에서만 거룩한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목사라고 생색내며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교회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목사로서 부끄럼 없이 살고자 할 뿐입니다. 나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 ‘목사였어? 어쩐지 달라.’ 이런 긍정의 평가를 들을 수 있으면 목사로서 그런대로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며 삽니다.
삶으로 살아지지 않거나, 포장되는 신앙은 위선입니다.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데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 그것이 새 사람의 바른생활입니다. 여러분들과 친밀한 이들에게 교회 생활과 일상의 괴리가 없는 일치된 삶을 보여주시고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 길에 서 있는 바른생활’입니다.
▪여러 갈래 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길, 진리, 생명, 말씀, 사람의 아들, 어린 양’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하는 말씀은 예수님의 다른 표현이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진리의 길에 서 있는 것이고, 진리의 길에 서 있으니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마치 산을 오르는데 여러 갈래 길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길을 택하든 정상과 이어지지만, 어느 길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길은 더 험하기도 하고, 평탄하기도 합니다. 피어있는 꽃도 다르고 나무도 다릅니다. 이것을 표현할 때 서로 경험한 것이 다르기에 길 혹은 진리, 생명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틀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어느 곳에서는 맞고, 어느 곳에서는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런 의미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하신 것이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은 누구입니까?
신학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절대자, 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요한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가고자 한다면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웃 종교를 저주하는 말 정도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 분쟁의 종교, 전쟁의 종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존 레넌이 ‘이매진’이라는 노래에서 국가와 종교가 없는 세상을 노래한 것입니다. ‘국가와 종교가 없었더라면 평화로운 세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국가와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은 그를 몽상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몽상가가 많아져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가나 종교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이요

‘생명’은 참으로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영생’입니다. 이것은 ‘불로장생’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생명을 이어가는 선한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범죄했을 때,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홍수로 심판하셨을 때, 바벨탑을 쌓았을 때, 소돔과 고모라, 가나안에서의 우상숭배를 했을 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가죽옷을, 카인에게는 죽임을 당하지 않을 표를, 노아홍수 뒤에는 무지개 언약을,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이스라엘의 죄...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이신 것입니다.
■ 하나님께 이르는 길

오늘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합니다. 이미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마음의 눈이 멀었다.’고 표현합니다. 눈이 멀었으니 봐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그 길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내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서(요 14:15,16)” 하나님께 이르는 길로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

‘보혜사’는 ‘도우시는 분, 중보자’라는 뜻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중 성령이시며, 지금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 인하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그분의 도움 없이도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바른생활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제가 종종 여러분에게 소개한 시가 있습니다. 구상 시인의 ‘마음의 눈을 뜨니’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구상 시인이 70이 넘어서 쓴 시입니다. 시인이 그 나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이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 노력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
마음의 눈을 뜬다.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
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
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
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겠습니까?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합력해서 선을 이룬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인생사가 그렇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새 사람의 바른 생활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바로 서서 걸어가는 삶이요, 그 길을 걸어갈 때에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때 보혜사 성령께서 도우셔서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의 신비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기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 길에 서서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우리가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갈 때에 보혜사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신기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슬기롭게, 즐겁게 새 사람의 바른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