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셋째주일(20230917)
메타노이아 – 새 사람의 물질생활
누가복음 18:18~30

창조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창조절 첫째 주일에는 ‘메타노이아-새 사람을 입으라’, 둘째주일에는 새 사람의 구체적인 삶으로 ‘메타노이아 – 언어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새 사람의 구체적인 삶으로 ‘메타노이아-물질생활’에 관한 말씀을 나눕니다.
기독교에서 ‘물질’에 관한 주제는 참으로 난해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복 받은 사람의 증거’로서 물질이 표현되는가 하면, 오늘 읽은 본문말씀 같은 경우에는 아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라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복 받은 증거라면 ‘가난한 사람들’은 복 받지 못한 것이며,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취급 당하는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이야기처럼, 하나님을 잘 믿었는지 아닌지 여부에 관계없이 이 땅에서 가난했으니 하늘에서는 하나님 곁에 있고, 부자였으니 지옥 불에 가야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공의로운 심판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이런 상반된 내용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물질생활’에 관한 말씀은 강단에서 기피되었습니다.
예수는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고, 성경의 관심도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합비루, 떠돌이 노예생활을 했던 이들로부터 시작된 성경의 관점은 늘 억눌린 자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는 사실상 지배자들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우리의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경제체제, 정치, 문화 등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럽을 넘어 북아메리카로 진출을 한 이후, 기독교 국가를 표방한 미국은 소련연방 해체 이후 초강대국이 되었고, 기독교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의 기독교 역시도 미국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종교는 일단 외적으로는 부흥합니다. 그러나 지배체제를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종교는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양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유신체제 때 지배체제의 편을 들지 않고 항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교세가 작아도 부끄럽지 않았는데, 요즘은 많이 흔들려서 양적인 성장도 질적인 성장도 이루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대표지성이라 일컬어지는 평론가 케빈 필립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말까지 20년 동안, 미국 인구의 상위 1%가 소유한 전체 재산의 퍼센트는 21%에서 40%까지 거의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인의 하위 60%의 연간소득과 순 재산은 실제로 하락’했습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상위 1%의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일했기 때문도 아니고, 중산층과 하류층의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아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유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구조를 가진 ‘경제체제의 방식’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경제체제를 갖게 된 이유는 경제체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2001년 ~2003년 감세정책으로 인해 가장 부유한 1%의 부유한 사람들은 감세 총액의 절반의 수익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자본주의사회는 기본적으로 자본을 소유한 부유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체제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산 문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듣기에 따라서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이 마치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비판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재산의 문제는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들이든 개인적인 선함 혹은 미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들도 개인적으로 선한 사람들일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다 선한 것도 아닙니다. 빈부격차의 문제는 개인의 선함이나 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경제체제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체제가 기본적으로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많이 한 개인이 부자냐 아니냐가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가난한 분들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에 ‘더 많이 갖고 싶다는 물질에 대한 소유욕만 가득하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는 복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재산과 영향력을 선하게 사용할 것인가?”하는 것을 고민하고 행동하면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안나, 수산나, 뵈베,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대의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전에 매력을 느끼고 감동해서 기꺼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 헌신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지배계급에 속해 있었지만, 지배계급의 마법에서 풀려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부자들 중에서 하나님을 잘 섬긴 이들은 경제적으로 안락하거나 부유한 사람들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요안나, 수산나, 뵈베,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이 되는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그런 이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즉, 경제적으로 안락하지만 불의한 체제에 순응하는 마법에서 풀려나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기초한 교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본은 꼭 필요하지만, 자본의 마법에서 풀려난 이들의 헌신과 과부의 헌금으로 세워진 교회라야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남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에게 부자관리가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 부자 관리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과 부자의 대화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부자를 나무라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니 미소를 지으시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하며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 방법이 참으로 쉽지 않은 것입니다. 재산 중 일부만 팔아서 나누라고 하면 할 수 있겠는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22)’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부자 관리는 근심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부자 관리가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동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깊이 이해되지 않고 피상적으로 전해진 점이 있습니다.
두 가지인데 ‘첫째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둘째, 바친 것의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어렵다’고 했지 ‘못 간다’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몇 배를 더 받으려고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가 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면, 버림 받은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 관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참뜻은 “당신의 재산과 그로 인한 영향력을 선하게 사용하라.”는 말씀이요, ‘모든 것을 다 팔아’라는 의미는, 그런 심정으로 하지 않으면 자기의 것을 나눈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나누되 모든 것을 다 팔아 나누는 심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이 없으면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고, 자본이 없으면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자본의 논리를 따라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자본의 논리는 끊임없이 소유하고, 잉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며,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셰안 클레어본과 크리스호라의 공저 『대통령 예수』라는 책의 서두 부분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교회 속에 있는 우리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국가와 군대와 시장의 힘만이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 체제에 순응하는 복음은 죽은 복음입니다.
부자 관원의 고민은 하나님을 잘 믿고 싶지만, 영생을 얻고 싶지만,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하지만, 예수님보다는 물질, 재산, 자본 이런 것들을 더 의지하게 되는 현실이었습니다. 이 고민은 오늘 우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섬김의 대상이 되는 순간 재물은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는데, 한 주인을 섬기면 다른 주인을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의 주인은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물으시며 선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큰 고민 없이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가르쳐왔기 때문에 한국 성도들은 ‘돈’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세우질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물질에 관해 올바른 자세를 갖고자하는 이들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청부론자’들은 결국 돈을 사랑하는 쪽으로 기울어서 돈을 추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격려합니다. 혹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헌금을 강요합니다.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참 뜻은 첫째,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은 가난한 사람도 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낙타와 바늘귀를 비유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부자의 이야기가 은유하는 바는 ‘물질에 대한 욕심과 집착’에 빠져있는 사람에 관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물질은 쌓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낭비’라고 합니다. 소비하고 낭비하되 ‘선한 일’에 사용하는 지혜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새 사람의 물질생활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자족하면서 검소하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자도 하나님의 일에 기꺼이 물질을 헌신하면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은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런 삶은 지배계급의 마법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자족하는 삶의 기쁨을 알게 하셔서 우리가 돈을 주인으로 섬기지 말게 하옵소서. 세상은 돈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게 하시고, 주님께서 주신 물질을 거룩하게 사용하게 하옵소서. 입을 것과 먹을 것, 이방인의 염려에 사로잡혀 살지 말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차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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