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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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후 11주] 종교개혁지 탐방 보고

  • 관리자
  • 2023-08-1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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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11주/ 광복절 감사주일(20230813)
그 어디나 하늘 나라 – 종교개혁지 탐방 보고
요한복음 14:20~21


■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83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후렴구에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고백대로 하늘나라, 천국, 하나님 나라는 저기 혹은 사후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곳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기를 천국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 체코 프라하의 얀 후스



여름휴가를 겸하여 지난 7월 24일부터 8월 3일까지 종교개혁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일정은 체코 프라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라하 광장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하니 잠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둘째 날 아침,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종교개혁을 이어받은 저항 세력이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한 요새 도시 타보르로 이동하여 후스 박물관과 지하카타콤, 후스 광장을 돌아보았습니다.

얀 후스는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건 사람입니다. 후스의 모토는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였습니다. 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신학교수 및 총장을 역임했던 그는 가톨릭교회의 문제와 부패를 비판하며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화형 당했습니다.

타보르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로마 제국전체에 대항한 하나의 도시였고, 신앙의 사수를 위해 지하카타콤으로 불리는 지하로 연결된 도시를 만들어 가면서까지 끝내 신앙을 지키고자 했지만, 결국 황제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후스의 사상을 계승한 후스파(Husité)가 가톨릭의 핍박을 피해 ‘헤른후트’에 형제교회를 세우고 신앙공동체를 이뤘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 95개조 반박문 비텐베르크교회



헤른후트 공동묘지를 돌아보고, 버스로 4시간여를 이동하여 체코에서 독일로 이동하여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비텐베르크교회와 루터하우스를 방문했습니다.

100년 전 후스의 종교개혁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사그러드는 듯했지만,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인쇄술의 발달을 힘입어 교황청에서도 감히 루터를 정죄하지 못할 만큼 유럽 일대에 퍼지게 됩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이후, 루터는 다양한 이들의 다양한 질문에 대해 답을 했고, 그 과정에서 종교개혁 동지인 멜란히톤이라는 신학자는 루터의 신학사상을 체계화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며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기초를 세웁니다.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하우스, 멜란히톤의 하우스, 성마리엔 교회당을 방문했습니다. 
 

■ 피난처 바르크부르크



그러나 이런 과정들이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교황청에서는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익과 권력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는 이들을 어떻게든 없애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루터는 너무 유명해졌고, 교황청에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늘 살해 위협이 있었기에 바르크부르크 성의 다락방에 숨어 지내며 신약성경을 번역합니다.

종교개혁에 있어 성경번역이 중요했던 이유는, 사제들만 독점하던 라틴어성경을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데 있습니다. 바르크부르크 성 방문 전에,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은 세베루스 교회도 방문을 했고, 이후에는 보름스로 이동하여 바흐하우스와 루터 생가, 유아 세례를 받았던 교회 방문을 한 이후,  루터 광장의 기념비 등을 방문한 이후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습니다.
 

■ 철학자의 도시 하이델베르크



프랑크푸르트에서 교리문답을 잉태한 하이델베르크로 이동하여 고성과 대학, 성령교회 등을 돌아봤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의 후원으로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프리드리히 3세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학교와 교회, 청소년들의 의무교육교재로 사용되었고, 주일 오후예배에서는 장년들에게도 설교되었습니다. 출판 즉시,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고, 교리문답의 전설이 됩니다.

하이델베르크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돌아보면 아주 좋은 영감을 주는 장소가 될 듯합니다. 철학자의 도시답게 하이델베르크 대학 출신 중에서는 막스 베버, 에리히 프롬, 괴벨스, 한나 아렌스 등 유명 인사들도 많습니다.
 

■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진 마을들



사나흘 동안 체코에서부터 스위스 취리히까지 20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했는데. 차창으로 보는 풍광도 참 좋았습니다.
산악국가 스위스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산이나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체코에서부터 독일을 지나는 내내 밀 옥수수, 해바라기가 심겨진 밭의 지평선이 펼쳐졌습니다.

나지막한 집들과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들, 독일의 교육철학과 국가정책, 문화, 역사, 그들의 민족적 자긍심 같은 것으로 인한 여유가 부러웠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유물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현대적인 편리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스위스 종교개혁자 쯔빙글리



스위스의 종교개혁의 중심지는 취리히입니다.
취리히에서 전철을 타고 쯔빙글리가 설교를 했던 그로스뮌스터교회,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의 동상, 샤갈의 스테인글라스가 있는 프라우뮌스터교회 등을 돌아봤습니다.

쯔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루터, 장 칼뱅과 함께 아울러서 종교 개혁의 거두로 평가됩니다. 쯔빙글리가 주장한 신학의 핵심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며 그 권위는 어떠한 종교회의나 교부들의 주장보다도 더 높다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회의나 교부들이 제 입맛에 따라 성경을 왜곡하는 것에 대해 일침을 날린 것입니다. 쯔빙글리 동상을 보면 칼을 쥐고 있습니다.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다는 것은 곧 로마가톨릭과의 전쟁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칼 뒤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 알프스의 영봉 융프라우



다음날 인터라켄으로 이동하여 알프스의 영봉 융프라우에 올라 만년설도 보았습니다.
제가 오른 산 중에 가장 높은 산이 해발 1,947m의; 한라산이었는데, 융프라우는 해발 3,454m이었습니다. 어지럼증과 호흡곤란이 와서 힘들었지만, 만년설 아래 초록생명들과 수천종의 야생화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습니다. 그곳은 영하 1도 정도였지만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매년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속도가 빨라졌답니다. 그럼에도 무더운 여름에 만년설 위에서 덜덜 떨었던 기억은 추억으로 오래 남을 듯합니다. 
 

■ 생 페이르교회에서의 주일예배


융프라우에서 내려와 로잔에서 1박을 한 후, 제네바로 이동하여 제네바대학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는 공원을 방문한 후, 생 페에르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적어도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교회지만, 여행객을 빼면 50여 명 정도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예배 설교는 요한복음 5장 1~18절의 ‘베데스다연못’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불어로 진행되는 예배다보니 감동이 없을 것 같았는데, 예식에 따라 드리는 예배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니 교인 중 한 분이 자기도 WCC가맹교단에 속한 교인이라며 반겨줍니다.

칼뱅의 묘지를 방문한 후 TGV를 타고 리용으로 갔습니다. 리용에서 칼뱅이 태어난 노용으로 이동하여 칼뱅 박물관과 생가, 그가 다니던 생 피에르 교회 등을 방문했습니다.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 개혁 때부터 시작된 장로교와 개혁교회, 개혁 침례교회 또는 칼뱅주의적 침례교회가 대표적입니다. 우리도 장로교회이므로 칼뱅의 신학을 포방하고 있습니다만, 현실은 칼뱅신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낮다는 것입니다. 뿌리는 있으되 뿌리를 몰라서 뿌리가 없는 것 같은 이상한 신학이 한국교회에 만연합니다.
 

■ 몽마르뜨 언덕의 성심교회



파리에서는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부터 10월까지 로마 가톨릭교회 추종자들이 위그노 즉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학살했던 장소를 방문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혹독했던 탄압으로 인해 지금도 프랑스의 개신교는 2~3% 내외입니다. 현지교회를 하는 개신교목사님을 만났는데 코로나 이후 거의 회생불가할 만큼 힘들다고 합니다.

파리에서는 몽마르뜨 언덕에 있는 성심교회를 방문한 이후, 개선문, 상제리제거리, 센강유람선, 에펠탑, 베르사이유궁전, 오르세 미술관, 루브르박물관 등을 둘러보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곳이 다 좋았습니다만, 다시 갈 수 있다면 체코 프라하, 스위스 융프라우, 독일 하이델베르크는 한 일주일 정도씩 머물면서 천천히 돌아보고 싶습니다.
 

■ 단상들



첫째, ‘지금 여기’의 중요성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머무는 것입니다. 여행 내내 “나는 고향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하나님 나라는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니 여행 내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둘째,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입니다. 책으로 공부한 것과 실제로 본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전에 여행지에 대해 공부하면 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 복기를 하면, 기억도 오래 남지만, 놓치고 온 것을 알게 되어 또 가고 싶어지게 됩니다. 

셋째, ‘사회복지정책’입니다. 유럽의 사회체제는 ‘노동자와 약자 중심’이었습니다. 배우고 본 벌어서 남 주는 나라입니다. 그러다보니 교육체계도 다르고 근본적으로 가치관이 다릅니다. 서로를 배려할 줄 알고, 타인의 개성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죠. 저는 이것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이런 사회다보니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개성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종교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은 적지만, 신앙생활은 그들의 일상이라는 점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기독교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평신도들도 신학에 대해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겉모습은 신앙인처럼 보이지 않지만, 대부분 신앙인입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저의 숙제가 될 것입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한국의 개신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많이 다른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짧은 시간이기에 종교개혁지 탐방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길어 올린 것들은 서서히 저의 신앙과 목회에 적용될 것입니다. 여행하는 내내 교회를 지켜주시고,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거둠 기도]
한 분이신 하나님,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났고, 그들은 비록 박해를 받아 화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이름은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자 할 때에 주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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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4일 ~8월 4일간 다녀온 종교개혁지 탐방보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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