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열 번째 주일(20230806)
삶의 중심
창세기 32:22~31
설교: 허준혁 부목사
8월의 첫 주일, 성령강림 후 열 번째 예배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영이신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숨 막히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틀 후면 입추고, 나흘 뒤면 말복이라는데 이젠 기후가 바뀌어 절기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한 주였습니다.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불쾌지수도 높아졌습니다. 마음을 조절하기 쉽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이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처럼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벌어진 흉기 난동 사건과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자기의 분노를 희생양에 쏟아내는 모습이 보여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분노는 누구나 있습니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 중에 분노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욥기(5장 2절)를 보면, 욥은 자기를 힘들고 괴롭히는 불행 속에서도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라고 일갈하며 나의 처지를 하나님께 털어놓고 의지하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도 고통과 분노가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도 삶의 순간에서 화가 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 중심에 무엇이 있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들여다보면서 분노를 표출하기보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왜 화가 났는지, 오랫동안 쌓여온 거라면 하나님께 털어놓는 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야기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의 욕망으로 잃게 된 형을 만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여전히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는 먼저 심부름꾼을 보내 에돔 벌 세일 땅에 살고 있던 형 에서에게 자신이 간다는 소식을 알렸는데, 심부름꾼이 에서가 그의 부하 4백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자신을 죽이겠다고 했던 형이 부하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겠다고 하신 축복의 약속을, 은혜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간곡히 기도합니다. 이도 모자라 형에게 줄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리곤 선물을 몇 떼로 나누어 먼저 보내고, 종들에게 주인의 종 야곱이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그리곤 식구들도 먼저 보내고 난 뒤,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지 모르는 이와 씨름했습니다. 이야기가 뜬금없이 흘러갑니다. 그는 밤새도록 야곱을 꺾지 못했고, 대신 엉덩이뼈를 쳤습니다. 게다가 그는 야곱을 뿌리치지도 못했습니다. 야곱은 그에게 축복해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그는 야곱의 이름을 물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야곱은 그제야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도 살아있다며,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형 에서와 화해하러 가는 길목에 뜬금없는 이와 씨름을 하고 그로부터 축복받은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요? 왜 그 이야기가 갑자기 들어간 걸까요?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야곱의 삶은 그의 욕심으로 인해 뒤범벅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자신의 욕망이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경쟁했습니다. 맏아들이 되고 싶어 발뒤꿈치를 잡았습니다. 당시 맏아들이 가진 특권을 그 갓난아기가 알았을까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그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형 에서는 사냥을 즐겼고,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야곱은 성격이 차분해 주로 집에 있었고,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맏아들의 특권을 얻고 싶었던 야곱은 사냥에 지쳐 돌아온 형을 먹을 것으로 유혹해서 특권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맏아들의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맏아들의 특권도, 축복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습니다. 형에게 죽을 위기에 놓였고, 외삼촌 라반의 집까지 도망쳐야 했습니다. 타향에서도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라헬을 사랑해서 7년간 일했지만, 언니인 레아와 먼저 결혼하게 됐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던 라반의 계략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7년을 더 일하고 나서야 라헬을 얻게 됐습니다. 라반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일했으면서도 라반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 야곱은 그에게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원하는 걸 갖고 태어나지 못했고, 속이거나 빼앗아야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큰 가족을 이뤘고, 재산도 많이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이뤄낸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럼 야곱은 성공했고, 금의환향하는 걸까요?
저는 아까 야곱의 삶이 욕심으로 인해 뒤범벅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걸 갖고자 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을 보며, 현대 사회가 원하는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어릴 때부터 경쟁시켰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경쟁하길 바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더라도 먼저 출발할 수 있으면 하게 하고, 아예 출발선을 남들보다 앞에 두려고도 합니다.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착하게 되고, 친구가 아닌 경쟁자를 만나게 됩니다. 예전엔 같은 반 친구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같은 반 누군가일 뿐입니다. 과하게 부추겨진 욕망은 아이들을 오로지 자기중심적으로 성장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파편화된 교실은 더 이상 교육의 장이 아닌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시험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걸로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어른들이 그러니 아이들이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법보다 나를 중심으로 상대를 위아래로 판단해서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건 어른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어떻게 함께 어울려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나만 성공하면 된다, 내가 위에 있으면 아래에 있는 누군가에겐 함부로 해도 된다는 태도가 난무한 현실에서 올바른 교육이 이뤄질 리 없습니다. 야곱의 삶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누군가는 야곱이 욕망이라도 가졌으니 대가족과 부를 이루었다고 말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었다면, 형 에서를 다시 만날 필요도 없고 어디엔가 정착해서 잘 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음 잘못했던 형을 만나게 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하나님은 야곱에게 가르쳐주려던 건 아니었을까요?
야곱은 형 에서를 위한 선물과 가족 모두 보낸 후에 얍복 나루에 혼자 남았습니다. 형과의 만남을 앞두고, 혹 그의 마음에선 죽음을 앞두었다고 여겼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그는 두려움과 욕심이 앞서 있습니다. 그렇게 혼자 남아 삶을 돌아봤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그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 나라, 배경 모두 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숙명입니다. 하지만 모두 숙명대로 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욕망이 그의 숙명을 극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더 엇나가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누군가와의 씨름을 통해 야곱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 이룬 줄 알았지만, 그는 가족과 떨어졌고, 누구와도 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남은 건 허울뿐인 재산이었습니다. 야곱은 누군가와 씨름하며 이전의 삶을 돌아보았고,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속인다,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의미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의미인 이스라엘로 새롭게 거듭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삶의 주인이었던 그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앞세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듯 보였지만, 야곱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오늘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앞세운다는 의미는 삶의 중심을 옮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에 갔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나를 이끄셨다고 표현합니다. 삶의 선택에 있어 나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을 두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사회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상식에서 어긋나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불의한 사회에서 약자들을 대변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개의치 않습니다.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7편에서 시인은 적들이 나를 에워싸고, 먹이를 노리는 기운 센 사자와 같은 이들이 노려보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기에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들과 맞대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벌을 받는 거라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음에도 삶이 힘겹다면 그것은 복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인의 복은 그런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주위에서 성공했다는 것이 복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서 삶이 힘겨워졌다면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발뒤꿈치를 잡다 혹은 속인다는 나쁜 의미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축복의 의미가 담겼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삶, 거듭난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엉덩이뼈가 다친 것은 그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자기 욕심에 치우쳐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나의 욕망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저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을 돌아봤고, 끝을 알 수 없는 씨름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이전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이해와 배려의 폭이 좁아지고, 감정적인 대응과 폭력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사회의 안전망은 사라지고, 국민의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해결해야 할 대표들은 서로 이익을 위해 이전투구를 일삼습니다. 오로지 힘과 권력을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어렵고 괴로운 이들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한 이들입니다. 현대 사회는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경제적이라는 논리로 사람의 욕망을 그 앞에 두라고 요구합니다. 당연히 이해와 배려를 옆으로 치워버린 채 말이죠. 지하철역에 그렇게 많은 계단이 있다는 건 평소에 잘 모르다가 발이나 다리를 다치는 즉시 알게 됩니다. 어른들의 편리와 만족을 위한 노키즈존이 얼마나 많은 부모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릅니다. 새로운 기기에 익숙지 않은 어르신들은 이제 어딜 가나 있는 키오스크를 무서워합니다. 자세히 보면, 키오스크라는 기기보다 내 뒷사람의 차가운 눈초리를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최저임금이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최저임금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모두 자기의 욕망을 중심에 두고, 그것이 최선인 것처럼 삽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소식은 매우 불편합니다. 이해와 배려가 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내 눈과 귀에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일일까요? (마태복음 14장)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죽은 뒤에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축복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떡으로 5천 명을 먹이셨다는 놀라운 사실보다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도 아니었고, 권력자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따른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매주 교회에 나가서가 아니라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기에 이해와 배려가 드러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야곱은 형 에서를 위한 선물과 가족을 모두 보내고 혼자 남았습니다. 형을 만날 두려움에 휩싸였고, 그동안의 삶을 곱씹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이와 씨름을 했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제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자신을 마음의 중심에 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대가족을 이루고, 큰 재산을 얻은 것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것이 축복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기독교인인 우리는 서로 경쟁의 대상으로 삼고 이해와 배려는 간곳없으며 감정적 대응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자 합니다. 기독교인은 교회를 다녀서가 아니라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품는 사람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거둠기도 :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주님, 오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마음에 품게 된 과정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경쟁과 투쟁이 삶의 현실이 된 우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품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고백하오니 우리를 이끌어주옵소서. 당신의 이끄심과 우리의 노력이 어우러져 새롭게 거듭나는 삶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