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아홉 번째 주일(20230730)
하나님의 사랑과 이어지기
로마서 8:37~39
설교 : 허준혁 부목사
7월의 마지막 주일, 성령강림 후 아홉 번째 예배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영이신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이번 한 달은 자연재해뿐 아니라 슬픈 일이 연이어 발생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19일, 정부는 경북과 충남, 충북과 전북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여러 언론을 통해, 이번 물난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앗아갔으며 그로 인해 슬픔에 빠진 이들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수해복구에 투입된 한 군인과 푸른 꿈을 안고 아이들을 가르쳤던 한 선생님에게 닥친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공인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이들을 위한 지원에도 정치적 술수를 섞고, 사건을 축소하려는 이들을 보며 울분이 찼습니다. 하지만 자기 목숨이 위험한데도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한 의인과 슬픔에 공감하며 잇따르는 추모의 발길을 보며 희망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이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며 하나님의 위로와 자비가 그들과 그 유가족과 함께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같은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당시 100만 명이 넘게 사는 초대형 도시였습니다.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에서 유대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살았던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 삶의 터전을 옮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이스라엘 밖에 있던 유대 공동체는 지금의 한인 사회처럼 공동체를 이뤘고, 당시 허술했던 치안 시스템을 보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협할 때만 치안 시스템을 발동해서 로마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떤 공동체든 소속되어야 개인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한 공동체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과 분쟁이 발생했고 관계는 극한으로 치달았습니다. 급기야 40년 이후부터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소요가 일어났고 글라디우스 황제는 49년 유대인을 로마 시에서 추방했습니다. 54년에 추방령이 풀렸고 다시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로마 시에 살게 됐지만, 이전 로마 황제로부터 추방당했을 정도로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위험한 유대인이라며 로마에 고발했고, 공동체에서 몰아내기 위한 힘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로마의 문화는 기독교인들을 압도했습니다. 돈과 권력만 있다면 눈, 코, 입 모두를 만족시키는 여기가 천국이라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식민지 여기저기서 착취한 돈으로 만든 로마의 화려한 문화는 그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습니다. 로마의 위대한 권세는 끝없이 지속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들에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안팎으로 고난과 위험에 빠진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읽은 8장에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의 상황을 반영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여러분, 단장지애(斷腸之哀)라는 말 아시죠?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을 가리키는 말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이르는 말입니다. 최근 수해가 났을 때, 구명조끼 없이 구조활동을 벌이던 해병대원이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방이 무너져 강물이 유입된 오송 지하차도에선 14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선 푸른 꿈을 품고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자식을, 가족을 잃은 슬픔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께서 자신을 따라온 무리를 목자 없는 양 같다며 불쌍히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불쌍하다는 말이 그리스어로 ‘σπλαγχνιζομαι(스플랑크니쪼마이)’로 장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들이 불쌍해서 도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악한 상황에 깊이 공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웃의 아픔에 깊이 공감했던 예수는 불의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수를 부활시키셨고, 메시아를 잃고 절망과 실의에 빠졌던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꿈꿨던 욕망의 실체와 마주했습니다. 이후에 그동안 바랐던, 그들이 꿈꾸었던 모습이 아닌 예수가 가르쳐주셨던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지금 로마의 기독교인들도 유대인과의 갈등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고, 화려한 로마의 문화가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보살피고 은혜를 베푸는 존재인 보혜사 전통에 기대어 성령에 의한 기도의 중보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예수를 보내신 그의 사랑은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이기고도 남는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한계를 언급했습니다. 죽음과 삶, 천사와 권세자, 현재와 미래, 높음과 깊은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생존의 위협과 위험한 유혹을 이겨낼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사회의 여러 부조리 속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인들은 책임지고 부조리를 고치는 대신 서로의 책임이라며 정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로 예기치 못한 재해가 생기고 인간의 욕망으로 촉발된 지구의 아픔은 모든 생명체를 위험에 빠뜨렸으며 주동자인 인간에게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세계 전체에 퍼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많은 위험에 놓인 이들이 누구일까요? 입이 없어 말하지 못하는 자연 생태계와 입이 있어 울부짖어도 관심 두는 사람 없는 약자들입니다. 분명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셨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따르고자 하는 우리가 죽음의 그림자가 무겁게 뒤덮이는 이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끊기지 않고, 이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감수성을 세심하게 다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과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을 훼손하고 이웃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음에도 우리만 행복할 수 있을까요? 행복은 나만 성공하고 즐거울 때 오지 않습니다. 성공했을 때, 나만 기쁘다면 그건 자아도취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할 때, 언젠가 그 고통과 슬픔은 분명 우리에게 닥칠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질투에 사로잡혔던 가인이 아벨이 어디 있냐고 묻는 하나님의 질문에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아벨을 죽이고 나서 가인은 이제 하나님이 자기의 제사를 잘 받으시겠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행복해지겠구나’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자연과 이웃이 슬퍼 울부짖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까요? 그래서 우리가 이를 외면해선 안 됩니다. 평소 하던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하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보다 더 화려하고 자극적인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신앙은 위태롭게 흔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매체를 통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나 사람은 환경에 지배받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환경에 매몰되지도 않습니다. 요즘은 뉴스뿐 아니라 수많은 매체가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냅니다. 가짜뉴스와 거짓 정보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가짜뉴스는 최근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제자들과 달리 그를 죽음으로 몰았던 기득권 세력이 진실을 왜곡하고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무덤을 지키던 병사에게 뇌물을 주며 누가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이 쓰일 때까지, 대략 4~50년 동안 많은 유대인이 그 거짓 소문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올바른 시각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때보다 더 압도적인 물량으로 뒤덮인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고 말 거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른 시각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기사의 출처를 확인하고, 누가 썼는지, 그 사람이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점검하고, 주장의 근거가 합리적인지 살펴야 합니다. ‘누가 그러더라’라는 말과 ‘다들 그러던데’라고 얼버무리는 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진실을 못 보게 만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나는 것도 필요합니다. 나의 경험이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착각은 오히려 내 시선을 좁게 만듭니다. 나와 경험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내 생각을 점검하는 것은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꼭 갖춰야 할 소양입니다. 이렇게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기지 않기 위해 우리는 나를 뛰어넘는 시도를 계속해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려면 실천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에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이 있음에도 야고보서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처럼 살고자 고백하면서도 예수의 삶을 너무 위대하게 만들어 따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보다 예수의 작은 행함을 내 주변부터 실천해보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부터 내 가족, 이웃에게 선함을 실천해보시겠습니까? 그 실천을 통해 상대뿐만 아니라 나도 변하고 거듭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남의 실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퍼져나가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사랑을 누구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멀어지게 하는 유혹은 매일 매순간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그곳을 외면하게 하고, 등을 돌리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린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유혹을 끊어내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팎으로 고난과 시련에 빠진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였고 보혜사 성령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기지 않으려 노력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연과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짜뉴스와 거짓 정보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또, ‘내 말이 맞다’, ‘내가 해봤는데 이렇다’라는 주장보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노력할 때, ‘σπλαγχνιζομαι(스플랑크니쪼마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기지 않고, 이어질 것입니다.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와 나눌 수 없고, 우리의 현실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펼쳐져 있습니다. 매일 매순간 다가오는 유혹을 극복하면서도 자연과 이웃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어지는 길이라 믿고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주님,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에 보낸 편지로 우리가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끊어질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어져 자연과 이웃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모습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성숙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