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여섯 번째주일(20230709)
에바다, 열려라!
마태복음 11:16~19

오늘 주님께 나와 예배하는 모든 분들에게 하늘의 복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귀를 열어주셔서 하늘의 음성을 듣는 귀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 왜, 에바다인가?

마가복음 7장에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며 “에바다!” 곧 “열려라!”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굳은 혀가 풀려 제대로 말하게 된 치유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바다, 열려라!”라는 제목만 보신 분들은 마태복음 11장의 본문에 이 제목이 붙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신 분도 계실 줄 압니다.
'에바다’는 아람어 ‘에파다’의 헬라어 음역으로 “열려라!”하는 뜻입니다. 들리지 않으니 말이 어눌한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니 어눌한 혀가 풀려 제대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혀가 풀려 제대로 말하려면 잘 들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피리를 불어도, 곡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 것은 귀가 막힌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보았습니다.
■ 귀가 닫힌 세대를 한탄하심

귀가 열려야 있어야 피리소리를 듣고 춤을 추고, 곡소리를 듣고 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귀가 닫혀 있으니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금욕주의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귀신이 들렸다.’고 하더니만, 예수님의 먹고 마시는 행위에 대해서는 ‘흥청망청 먹어대는 자’라고 하면서 비난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를 선포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도 불편하게 여겼기에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지적하시면서 당시 놀이의 규칙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다른 해석 같은 이야기

어떤 분은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피리소리나 곡소리에 반응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피리를 불며 잔치를 하고자 할 때에는 세례 요한은 금식을 하고, 곡소리를 내니 예수께서 마구 먹으며 포도주를 먹으며 세리들과 잔치를 벌인다고 비판한 이야기를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도 결국 결론은 같습니다. 울어야할 때와 잔치를 해야할 때를 구별하지 못하는 세태는 ‘귀가 닫힌 세태’이기 때문입니다. 19절 하반절에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종교지도자들의 비난이나 행동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는 말씀입니다.
■ 오늘 우리는 어떤 소리를 봅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습니까?
어떻게 듣습니까?
고막이 떨리면 달팽이관을 통해서 뇌로 전달되는 방식의 소리를 듣습니까?
어떤 분들은 그렇게 듣는다고도 합니다만, 그것은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요,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방식으로 듣는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딱 한 번은 그런 경험은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목회를 할 때, 야생화에 빠져 살아갈 때의 일입니다. 숲길을 홀로 걷는데 “나 여기 있어요!”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깜짝 놀라 소리 나는 곳을 보니 작은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그 꽃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있다!” 그게 끝입니다. 너무 싱겁죠?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제 고백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설명을 하고, 그런 방식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형식보다는 다른 형태로 하나님은 더 많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저는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후에 제가 직접 만난 야생화 사진들을 모아 『하나님, 거기계셨군요?』라는 365일 풀꽃묵상집을 출간했습니다. 그래서 소리는 듣는 것인데, ‘어떤 소리를 봅니까?’라는 소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 마음의 눈을 뜨면

제가 종종 말씀을 드린 구상 시인의 시 ‘마음의 눈을 뜨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니 비로소 보이게 되고, 보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문장으로 말하는 사람이니, 마음의 눈을 뜬 이후의 시어(詩語)들이 주옥같은 시로 남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환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상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면 늘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은 이렇게 깨어있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나 권력자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껄끄러운 존재로 여겼던 것처럼, 지금도 깨어있는 자들을 껄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배척하고 마음의 눈을 감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뜨기가 쉽지 않은 것이고, 한 번 마음의 눈을 떴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거듭나야하는 것입니다.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요즘 저는 소위 원로라고 칭함을 받는 분들 중에서 구설수에 오른 몇몇 분들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의 속내가 드러나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존경받던 석학과 존경받던 목사가 한 마디 말로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당합니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는 세속의 가르침이 무색하게도 처음과 중간까지 다 좋았는데 마지막 황혼의 순간에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몇 마디 말로 속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지혜롭고 총명하던 석학이나 목사도 신자유주의 맘몬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긴장의 끈을 놓치고 살면 안 되겠구나 긴장도 하게 됩니다.
멋지게 나이 들기, 멋진 노년의 삶 살아가기, 결코 쉽지 않겠지만 마음의 눈을 뜨고, 우리 일상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간다면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텃밭에서 검질을 하며

제가 지난 주 하나님과 소통했던 경험을 나누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귀가 열린다는 것 혹은 마음의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소개해 드립니다.
모처에 거의 태평농법으로 가꾸는 작은 텃밭 있는데 손길이 뜸한 틈을 타서 잡초가 무성합니다. 장마철에 접어드니 잡초가 너무 많이 자랐습니다. 씨앗이 맺힐 때까지 그냥 두었다가는 ‘밭’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질 것 같습니다. 마침, 비도 그치고 비온 뒤라 잡초가 잘 뽑힙니다.
호미를 들고 잡초가 무성한 텃밭에 앉았습니다. 제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아이고, 주여!”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가꾼 채소들은 비실비실한데 가꾸지도 않은 잡초가 무성한 밭을 보니 제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좋은 목사가 되고 싶었는데 저를 돌아보니 “아이고, 주여!”소리가 절로 난 것입니다. 선한 것은 비료를 주고 북을 주어도 자라지 않는데 바라지도 않던 잡초는 이리도 실하게 잘 자라는 것이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너의 마음이다!”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 검질을 하며 회개를 했습니다(병행롬 7:15~25).

호미는 너무 오랜만에 사용해서 녹이 슬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사용하다보니 녹은 사라지고 반짝반짝 빛납니다. “사용되는 호미는 녹슬지 않는다.” 이것이 주님께서 들려주신 두 번째 말씀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날 이렇게 정리되었습니다. ‘몸을 사용하고(육체노동), 마음을 사용하고(독서, 묵상, 기도), 손과 발을 사용(나눔, 실천)하라. 그러면 당신의 삶은 녹슬지 않고 빛날 것이다.’

잡초의 뿌리까지 다 뽑아야하는데 여간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모조리 다 뽑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한들, 땅 속에 숨죽이고 있던 씨앗들이 또 올라올 것입니다. 뿌리 깊은 죄의 속성을 묵상합니다. 죄를 뽑아낼 때는 뿌리째 뽑아내야 겠구나 생각도 들고, 그렇게 해도 인간이기에 내 힘으로는 다 뽑아낼 수 없으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필요한 것이구나, 작은 죄의 씨앗도 방치하면 이렇게 자라게 되는구나,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것이구나. 이것이 세 번째 말씀입니다.

어떤 곳은 잡초가 우세하지만 어떤 곳은 채소가 우세합니다.
채소가 잘 자라는 곳에도 잡초가 있긴 하지만, 맥을 못 춥니다. 악한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악한 것을 미워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을 잘 가꾸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말씀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묵상을 하며 떠오르는 단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을 하는 것이 교만한 것일까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에바다, 열려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가 열린 치유의 당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가 닫힌 세대를 한탄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가 일상에 만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수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의 눈을 뜨시어 에바다의 기적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거둠 기도]

창조주 하나님,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귀가 멀어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가게 하셔서, 창세전에 우리를 향하신 위대한 계획을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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