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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4주] 상처 입은 치유자

  • 관리자
  • 2020-09-2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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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4주(2020년 9월 27일)
상처 입은 치유자
누가복음 10:25~37

 

오늘은 우리가 읽은 말씀은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도 익히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무 잘 알려진 말씀이라 그 속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들은 종종 지나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이웃 사랑’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Covid-19 상황에서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가 아픔을 감내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세상 모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의 이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강도만난 자를 돕는 자’입니다. 강도만난 자를 지나쳤던 이들,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하나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강도만난 사람을 지나쳤던 이들을 원수취급하면 안되겠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집니다. 그들에 대해서 ‘당신들은 문제가 있다’라고 분명하게 지적해주는 것, 그것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과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제가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저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느냐 묻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모든 힘과 모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다. 이것을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 질문과 대답 속에서 우리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른 차원임을 알게 됩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머리로 아는 것을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앎은 진정한 앎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작은 깨달음이라도 삶으로 살아갈 때 영생과 연결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고 싶어 예수님을 시험하던 율법학자는 이제 자신을 옳게 여기고 싶어서 또 질문을 합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말씀하셨는데, 자신은 나름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사마리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야기 끝에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율법학자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사람입니다.”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이 질문과 대답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자기 스스로 계명도 알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껍데기만 알고 있었던 것이며, 이웃사랑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웃이라고 사랑하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 같은 이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신앙적인 경건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배척하고 차별해야하는 대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머리로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천이 없었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 중 하나가 도중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버려두었습니다. 그때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다 길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갑니다. 제사장에 이어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해갑니다. 이번에는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여행하다가 그를 발견합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측은지심의 발로는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강도만난 자를 자기의 짐승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보살펴줍니다. 다음 날 떠나면서 은화 두 개를 여관주인에게 주며 강도만난 사람을 잘 돌봐주라고 하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어디론가 가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만난 사람을 보는 순간, 자신도 그런 위험에 빠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함께 강도만난 자와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강도만난 자와 엮이는 순간부터, 자신들의 평온했던 일상이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의 평온한 삶을 불편하게 할 수 그 무엇과 담을 쌓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강도만난 자를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난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강도만난 이들이 즐비합니다. 황폐화되어가는 자연, 나눔의 부재로 인한 가난, 차별받는 소수자들과 사회적인 약자들, 공장식 축산으로 고통 받는 동물들...그런데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불편한 마음이 싫어서 그냥 나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무관심합니다. 게다가 무관심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 일을 위해 헌신하고 힘쓰는 이들에게 손가락질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말씀은 세상일에 무관심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를 보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이 일어났습니다. 공감입니다. 우리말에 ‘오지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간혹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지랖 넓은 자는 복이 있다.” 그런데 여러분, 오지랖 넓은 사람에게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전혀!” 왜 그걸까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는 행동은 물 흐르는 원리와 같기 때문에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편합니다. 






여러분, 오지랖 넓은 신앙인이 되십시오. 이 말이 불편하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 공감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19이후의 세계를 예측한 석학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이상적인 미래형 인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Homo Empathicus-공감하는 인간’입니다. 4차 혁명, 인공지능 AI 시대가 와도 아무리 컴퓨터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공감의 능력’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미래형 인간으로 키우시고 싶다면 영어단어를 암기하게 하지 마시고 ‘공감능력’을 키워주십시오. 



얼마 전, 아이폰을 업데이트하라는 안내문자가 왔습니다.
안내에 따라 업데이트했더니 ‘번역’이라는 아이콘이 생성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최소한 15개국 언어가 자동으로 번역되는데 테스트를 해보니 거의 90%이상 완벽합니다. 그냥 한국어로 말하면, 원하는 언어로 번역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상대방이 말하면 자동으로 인식되어 한국어로 들립니다. 이제 미래의 아이들은 영어단어를 잘 외우는 아이들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을 잘 이용하는 아이들이 성공할 것입니다. 이전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있었지만, 요즘은 구글 검색창이 있습니다. 구글 검색을 통해서 대학교수 조차도 알지 못하는 지식을 초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입시교육의 근간이 되는 암기교육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불행한 사실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암기위주의 입시교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래의 인재는 잘 놀고, 건강하고, 공감할 줄 아는 아이들이 될 것입니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공감능력, 그것이 우리를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한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강도만난 사람이 몇 명 등장합니까? 예, 표면적으로는 한 사람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네 사람입니다. 강도만난 사람, 온갖 차별로 인해 개돼지 취급당하며 차별받는 사마리아 사람, 경직된 율법에 사로잡혀 사는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율법에 사로잡혀 살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갔으므로 자신들의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상처 입은 강도를 치유해줌으로써 자신도 치유를 받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상처 입은 치유자’인데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까지 갈 필요 없이 사마리아인도 상처 받은 사람입니다. 온갖 차별 속에서 상처를 입고 살아가던 사마리아인, 그가 강도만난 자를 치유하면서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고,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범이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제사장과 레위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영생’의 삶이 개돼지 취급당하던 사마리아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강도만난 한 사람의 치유이야기가 아니라 두 사람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강도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 모두 학대의 상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강도들에게 몸을 구타당하고 가진 것을 빼앗겼고, 한 사람은 당시 율법규례에 따라 영혼을 구타당했습니다. 한 사람은 강도들의 잔인함에 의해 상처를 입었고, 한 사람은 비뚤어지고 편협한 종교적인 관념에 의해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사회에서 상처받고 무시당했으며, 사회의 핵심부류이자 종교인인 레위인과 제상장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그들의 상처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을 편협하게 대하는 것이 종교적인 행위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편협한 생각으로 영혼을 억압하는 것은 그들을 향한 증오로 표출됩니다. 오늘 날에도 이런 현상은 다르지 않게 나타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이 없다면 우리 사회의 경제구조가 유지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자리를 그들이 빼앗아간다고 차별하고 증오하면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과 인권 사각지대에 사는 이들에게 손가락질합니다. 참으로 잔인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기독교인들조차도 ‘나그네와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마음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분명히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버릴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몰라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당연히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났을 것입니다. 늘 비웃음과 배척을 받고, 시기와 오해의 대상이 되고, 다른 사람의 계획과 야망에 이용당하며 사는 사마리아인의 마음도 산산이 부서진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자신을 옭아매는 장애물을 넘어섭니다.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희망이 움트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처를 받아 힘들 때, 그것을 붙들고 있지 마시고 놓아버리십시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장애물들을 놓아버릴 수 있을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강도만난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만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도,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 우리 자신을 타인에게 맡겨야 합니다. 타인으로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아들였을 때 강도만난 사람에게 살 길이 열렸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음을 자각했다면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이때 우리를 붙잡고 있는 온갖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는 스스로 반복해서 자신의 상처를 꺼내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상처에 대해 둔감해져야 합니다. 상처에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면 덧나게 됩니다. 자신의 상처를 꺼내놓으시고, 이야기하십시오. 상처 입은 사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상처를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 땅의 상처받은 많은 영혼들은 이해받기를 원합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상처받고 살아가는지를 누군가 이해해줄 때 그들의 상처는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살지 마시고 자신의 상처를 꺼내놓고 이야기하십시오.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해서 아프다면, 예수님께 아뢰십시오.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상처와 고통을 모두 이해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처를 놓아버리고, 그 상처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상처를 이해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품은 다음에는 치유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치유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가 되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 비로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아픔에 매여 있으면,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게도 상처가 있지만, 그 상처를 안고 강도만난 이웃의 상처를 보듬는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수긍하실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예수님을 시험하러온 율법학자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 강도가 뛰쳐나올지 모르는 그곳에서 치유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강도만난 자’와 다르지 않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깨달음 속에서 ‘그의 상처가 곧 나의 상처’임을 공감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강도만난 이웃을 치유하면서 우리의 상처도 치유하는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그렇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면서 강도를 만나 상처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에 새 살이 돋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도만난 이웃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일입니다. 강도만난 이웃의 상처를 남의 상처로 알고 무관심하게 돌아설 때, 나의 상처는 더 깊어 종양이 되고, 결국 나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가짜뉴스가 횡횡하며 우리 영혼에 상처를 냅니다. 지혜롭게 행동하시고, 용기를 내어 치유자로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기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옆구리와 손과 발에 상처를 입으신 주님, 그보다도 더 큰 상처를 마음에 새기고 사셨던 주님, 주님의 고난과 상처로 인해 우리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치유자로 살지 못하고, 강도만난 이웃을 피해가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도만난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온갖 혐오와 저주를 퍼붓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도 강도만난 자임을 자각하게 하시고, 우리의 상처는 이웃의 아픔을 치유해줄 때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지혜를 주셔서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게 하시고, 강도만난 이들을 만날 때 불쌍히 여기고 다가가는 공감의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앞에 선물로 주어진 영생의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게 하시고, 그 길을 걷는 중 만나는 강도들의 위협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음성설교 http://www.podbbang.com/ch/1775820?e=23794243
동영상설교 https://youtu.be/VHGfuJAiN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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